‘남장여자’ 코드가 재미와 흥행을 결정짓는 요소가 되었던 적이 있다. 어떤 이유가 있어 남장을 한 여자 주인공이 일으키는 해프닝, 남자라고 생각했는데 매력을 느끼며 혼란에 빠진 남자 주인공의 심리, 마음의 장벽을 넘어 사랑에 빠지는 모든 순간이 시청자의 마음을 콩닥거리게 했다. 이제는 다소 식상해진 설정을 적극 활용한 작품이 나왔다. ‘남장여자’가 주인공인 사극 로맨스 [연모]에선 주인공을 위험한 상황에 몰아넣은 게 눈에 띈다. 바로 조선의 왕위를 물려받을 ‘세자’라는 신분이다.

이미지: KBS

[연모]의 주인공은 오라비 세손의 이름으로 살아야 하는 쌍둥이 여동생이다. 여자라는 이유로 버림받은 아이는 10년 후, 담이라는 궁녀가 되어 세손 휘와 첫사랑 정지운을 만난다. 오라비 세손이 죽자, 어머니인 세자빈은 딸만은 살리기 위해 담이를 남장하고 휘로 살아가게 한다. 담이는 무시무시한 비밀을 품은 채 세자 휘가 되었지만 아버지 왕과 외조부 한기재의 권력 다툼 속에서 불안한 나날을 보낸다. 그는 모두를 지키기 위해선 누구를 가까이하거나 마음을 주어선 안 된다고 자신을 다그치며 살아간다. 어느 날, 지운이 세자의 글 선생이 되면서 둘은 다시 만나고, 휘의 마음은 자꾸만 흔들린다. 지운 또한 세자에게서 자신의 인생을 바꾼 담이의 모습을 발견하며 혼란을 느낀다.  

처음 [연모]에 관심을 가진 건 남장여자가 ‘왕이 된다’라는 설정 때문이었다. 한국 사극에서 여성이 권력을 잡는 경우는 많지만, 왕이 되거나 왕의 자리에 도전한 적은 없었다. 남장을 하고 모두를 속이고 있지만, 여성이 왕이 되기 위해 교육을 받고 정치판에 뛰어드는 이야기는 조금은 다르게 다가온다. 금기의 영역에 발을 들인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리고,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상상하며 설렘을 느끼게 한다. 게다가 그 인물을 박은빈이 연기한다는 점도 기대를 한껏 높였다. 아역배우 출신으로 꾸준히 좋은 연기를 해 왔고, 최근엔 한 작품을 장악하고 이끌어가는 모습을 보여줬다. 아슬아슬한 이중생활을 어떻게 표현할지, 상대역 로운과는 어떤 케미를 보여줄지도 궁금했다.

드라마 공개 후에 배우의 신체 조건이 극의 몰입에 방해된다는 지적이 나왔다. 박은빈의 키와 체격이 작고 외모가 여성스러워 왕세자의 위엄을 보여주는 데 한계가 있고, 굵고 힘 있는 발성은 작위적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주인공들이 함께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휘와 지운의 신분 차이와 박은빈과 로운의 체격 차이가 이질감을 빚어낸다는 반응이 많았다. 그런데 [연모]의 재미는 이런 게 아닐까. 왕세자의 곤룡포와 익선관이 없다면 아리따운 여인으로 보일 휘는 그의 위치와 권력 덕분에 의심을 사지 않는다. 오히려 체격은 왜소하고 목소리가 곱지만, 휘는 조선의 후계자다운 카리스마와 위엄을 보인다. 지운도 왕실 사냥터에서 만난 궁녀와 세자가 겹쳐 보였지만 “설마 세자 저하가?”라며 바로 생각을 고쳐먹는다. 세자 역에 걸맞은 신체 조건이란 없다. 그저 매력적인 캐릭터와 이를 잘 표현하는 배우만 있을 뿐이다.

이미지: KBS

각본과 연출은 다소 아쉽다. 휘와 지운이 티격태격하며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은 다른 로맨스 드라마와 비슷하다. 다만 두 사람의 이야기는 드라마의 서브플롯, 이를테면 휘와 혜종, 한기재의 갈등이나 조정 내 권력 싸움, 비밀을 지키려는 휘의 내적 갈등보다 굉장히 가볍게 그려진다. 무겁고 진지한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선택이라 생각하지만, 다른 이야기가 물과 기름처럼 어울리지 않는다. 지운을 그리는 방식도 아쉽다. 그는 굉장히 다채로운 삶을 살았고 신분 고하와 상관없이 사람을 아낀다. 그래서 코믹한 몸개그부터 아버지와의 충돌까지 다양한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데, 이를 표현하는 로운의 연기는 다소 단조로워 보인다. 전작에서 자신의 몫을 충분히 해내는 배우임을 보여줬기에 더 아쉽게 느껴진다.

[연모]가 갈 길은 아직 멀다. 전체의 절반도 공개되지 않았고, 주요 인물이 모두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휘와 지운이 사랑에 빠지고 주요 인물들의 갈등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이야기는 흥미진진해지고 분위기는 달라질 거라 예상한다. 아마도 휘는 왕의 자리를 버리고 사랑과 행복을 택할 것이다. 휘가 그런 선택을 하기까지의 과정을 얼마나 설득력 있게 그릴지 궁금하기에, 드라마를 끝까지 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