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튬을 입은 어른들과 사탕 바구니를 든 아이들의 상기된 얼굴. 모두가 핼러윈의 열기에 취해 있을 때, 눈두덩이를 검게 칠하고 검은 옷을 입은 남성이 조용히 고담시의 밤거리를 밟고 있다. 흡사 먹잇감을 노리는 포식자 같은 브루스 웨인의 형형한 눈빛은 핼러윈 분위기와 극명하게 대조된다. 여기에 망원경으로 훔쳐보는 듯한 카메라 시점이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이렇게 [더 배트맨]은 비밀스러운 불안감을 조성하면서 관객을 고담시로 초대한다.

([더 배트맨]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미지: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더 배트맨]은 배트맨이 수수께끼의 살인마 리들러가 던진 단서를 풀어가던 중, 리들러의 메시지가 자신을 향해 있음을 깨닫고 정의와 사적인 복수 사이에 갈등하는 이야기를 그린다.

자경단원으로 활동한지 2년 차지만 배트맨은 경찰국이나 주류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가 리들러의 첫 살인 현장에 도착했을 때도 경찰의 저지에 부딪힌다. 고든 경위의 조력하에 배트맨은 ‘세계 최고의 탐정’으로서의 면모를 즉각 발휘한다. 이내 배트맨은 리들러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캣우먼, 펭귄, 팔코네를 차례대로 만난다. 리들러가 짠 판에서 배트맨은 고담시의 뿌리 깊은 부패와 부모님이 숨긴 충격적인 진실을 마주한다.

[더 배트맨]은 배트맨과 브루스 웨인을 오가는 주인공의 정체성을 탐구한다. 브루스 웨인은 사회적 지위와 부를 갖췄지만 부모님의 죽음이 만든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런 그가 가면을 쓰면 하늘에 띄운 박쥐 표식만으로 범죄자들을 떨게 만드는 배트맨으로 변신한다. 배트맨이 자경단 임무를 수행하는 목적에는 정의를 향한 확고한 신념 따위는 없다. 영화는 복수라는 감정에 젖어 큰 의미 없이 살아가는 브루스 웨인의 행적을 그리면서 영웅의 ‘가능성’을 살펴본다.

이미지: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리들러는 배트맨과 자신이 닮아서 그를 표적으로 삼았다고 말한다. 방식이 조금 거칠지언정 범죄자를 응징하는 배트맨과 도시의 엘리트 집단을 살해하는 리들러 간에는 괴리감이 있어 보인다. 둘은 영웅 대 악당의 구도로 그려지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유사점이 많다. 배트맨과 리들러는 각자의 트라우마에 고통받고 있고, 행동 기저에는 분노가 가장 크게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리들러는 자신과 배트맨을 동일시하고 배트맨을 자신이 주도한 계획의 마지막 퍼즐 조각으로 선택한다.

이렇듯 [더 배트맨]은 인간의 뒤틀린 내면을 거칠고 신랄하게 모색한다. 자연스레 스토리에 무게가 실리고 액션의 비중은 적어진다. 무겁고 진득한 분위기가 3시간 동안 이어지는 범죄 누아르 영화다. 쾌감을 추구하는 일반적인 히어로 영화와는 거리가 멀다. 혈혈단신으로 수십 명을 제압하며 대리만족을 선사하는 액션은 찾아보기 힘들고 중간중간 분위기를 환기하는 가벼운 농담도 들리지 않는다.

이미지: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로맨스 역시 비중이 크지 않다. 배트맨과 리들러의 두뇌 싸움이 러닝타임을 대부분 가져가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배트맨과 캣우먼 간의 관계가 급진적으로 발전한 것처럼 다가온다. 극중 배트맨과 캣우먼의 관계는 내내 조력자로 그려지다가 어느 순간 애틋한 사이로 변모한다. 캣우먼이 배트맨을 연민하는 점은 납득할 수 있으나, 배트맨이 캣우먼에게 동질감을 느끼는 계기는 충분히 묘사되지 않는다.

맷 리브스 감독은 속편 여부가 관객의 반응에 달렸다고 말했다. 그래서일까. 주어진 시간 속에서 이야기를 온전히 매듭지으려는 그의 노력이 작품에서 엿보인다. 동시에 [더 배트맨]은 다음 이야기를 기대하게 만드는 요소를 담았다. 우선 리들러는 여전히 살아있고 그의 추종자들은 다시 음지로 숨어들었을 뿐, 사라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영화 말미에 목소리로 존재감을 드러낸 배트맨의 숙적 조커가 기대감을 한껏 끌어올린다. 과연 조커는 어렵게 희망의 불씨를 틔운 고담시를 다시 절망의 굴레로 몰아넣을 것인가. 배트맨과 조커의 운명적인 대결을 속편에서 볼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