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는 왕자와 결혼하여, 왕비가 된 후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어릴 적 우리가 본 대부분의 동화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보고 자란 공식에 의하면, 찰스 왕세자와 결혼한 후, 왕세자비가 된 다이애나는 오래오래 행복해야만 한다. 하지만 많은 대중들이 알다시피 왕국 속의 그는 새장에 갇힌 듯한 새처럼 불행했다. 영화 [스펜서]는 이러한 삶을 거꾸로 된 동화라 표현하며, 다이애나의 심리 상태를 밀도 있게 담아낸다.
세기의 아이콘이라 불린 다이애나의 드라마틱한 삶은 [다이애나], [더 크라운] 등 많은 영화와 드라마, 다큐멘터리에서 그려졌다. 하지만 영화 [스펜서]는 다이애나 비를 다룬 그 어떤 작품보다 핵심에 도달한다. 고루한 왕실의 전통과 찰스 왕세자의 외도, 그리고 24시간, 1분 1초 전 세계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압박감 속 그가 느끼는 혼란한 감정을 잘 묘사한다. 이후 크리스마스 연휴 기간 동안 벌어지는 왕실 가족 내 이야기를 통해 다이애나의 내면을 더욱 입체감 있게 드러낸다.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다이애나 스펜서, 그 자체였다. 크리스틴은 다양한 자료 조사와 함께 긴 시간을 투자하여 왕세자비의 스타일과 제스처, 심지어 억양까지 소화해냈다고 한다. 이러한 캐릭터 해석은 영화계를 놀라게 했고, 이 작품에서의 열연으로 2022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노미네이트를 비롯, 수 많은 시상식에서 트로피를 휩쓸었다. 필자는 다이애나 스펜서라는 인물에 대한 특별한 배경지식 하나 없는 사람이 이 영화를 보더라도 그의 삶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단언한다. 그만큼 배우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섬세한 연기력이 돋보인다.
조연 배우들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고 넘어갈 수 없다. 할리우드 최고 연기파 배우라고 할 수 있는 샐리 호킨스, 티모시 스폴, 숀 해리스 등의 깊이 있는 연기력 또한 영화에 묵직한 완성도를 더한다. 덧붙여 아직까지도 패션 아이콘이라 추양 받는 다이애나 스펜서의 의상들 역시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하며, 영화의 특별한 분위기를 만드는데 일조한다.
극중에서 사용된 음악 또한 흥미롭다. [스펜서] 속에서는 크게 두 가지의 음악이 흘러나오는데, 하나는 바로크 음악, 나머지는 재즈 음악이다. 파블로 라라인 감독은 “재즈 음악은 다이애나의 정체성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음악이었고, 바로크 음악은 왕실 가족을 위한 것이었다”라고 설명했다. 두 음악의 혼합은 실제 영화 속에서 굉장히 독특한 느낌을 선사하며, 관객들로 하여금 다이애나의 감정에 몰입할 수 있게 도와주는 최고의 장치로 다가온다.

모두가 해피 엔딩이라 여기는 결말을 박차고 나와 왕비가 되지 않기로 결심하기까지, 다이애나는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힘들었을 것이다. 고통의 시간을 지나 왕관을 내려놓고, 본연의 정체성을 찾아 나선 다이애나의 모습은 화려한 동화 속 주인공보다 눈부시다. 이 영화를 본 많은 이들이 다이애나를, ‘왕세자비’가 아닌 ‘다이애나 스펜서’라는 이름으로 오래오래 기억해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