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한국 영화계에 슬픈 소식이 들렸다. ‘대한민국 최초의 월드스타’ 배우 강수연 씨가 안타깝게도 우리 곁을 떠났다. 배우 강수연은 1969년 아역 배우로 데뷔, 80년대 청춘 아이콘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한국 배우 최초 세계 3대 영화제 연기상을 수상한 쾌거까지, 그의 필모그래피 자체가 한국영화사의 눈부신 순간이었다. ‘아역 배우는 성인 연기자로 성공할 수 없다’라는 속설을 탄탄한 연기력으로 깨버렸으며, 영화 촬영 현장에서 보여준 프로의식은 많은 후배 배우들의 본보기가 되었다.
스크린 밖에서도 강수연의 강단 있는 활동은 한국 영화의 든든한 버팀목으로 자리잡았다. 스크린쿼터 수호를 위해 앞장서서 거리에 나섰으며, [다이빙벨] 사태로 위기를 맞았던 부산국제영화제에 집행위원장을 역임, 영화인들의 화합을 도모했다. 영화 [베테랑]의 명대사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는 원래 강수연이 영화인 모임에서 한 말로 유명한데, 그만큼 영화인들의 자긍심을 지키고자 노력했던 그의 진심을 엿볼 수 있었다. ‘한국영화 그 자체’ 배우 강수연의 필모그래피 중 인상적인 몇몇 작품들을 통해 그의 발자취를 살펴본다.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는 배우 강수연의 풋풋한 젊음의 에너지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어른들은 몰라요]의 이규형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로, 두 대학생 철수와 미미의 유쾌한 캠퍼스 일기를 담았다. 박중훈, 김세준, 최양락도 출연해 이야기의 재미를 더한다. 특히 이 작품은 당시의 전형적인 청춘 드라마를 탈피해 개성 넘치는 캐릭터의 활약 속에 젊은이들의 고민과 이상을 공감 가게 담았다는 평을 받았다. 미미 역을 맡은 강수연의 매력 넘치는 연기로 영화는 흥행에 성공했고, 그 역시 80년대 대표 청춘스타로 발돋움했다.
씨받이

강수연의 이름을 전 세계에 알리게 한 작품이다. 조선시대 명문가의 씨받이로 들어가게 된 옥녀의 비극적인 운명을 그린 이야기로, 당시21세였던 강수연이 나이를 뛰어넘는 관록 있는 연기를 펼쳐 많은 주목을 받았다. 세상 물정 모르던 옥녀가 명문가의 씨받이가 되면서 겪는 감정적인 변화와 삶의 고초를 섬세하게 표현해 호평 받았다. 1987년 44회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한국영화는 물론 아시아 배우 최초로 볼피컵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뤘다. 이 수상을 기점으로 세계 영화계가 한국영화를 주목했고, 많은 발전을 이뤄낼 수 있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씨받이]에 이어 임권택 감독과 강수연 배우가 함께한 작품. 강수연은 여기서 주인공 순녀 역을 맡아, 상처뿐인 속세를 버리고 불도에 길을 걷는 비구니를 연기한다. 이후 죽음 직전의 한 사내를 구한 일에 연루되어 파계를 하게 된 가련한 운명을 인상적인 연기로 담아내어, 작품의 여운을 더욱 짙게 한다. 특히 20대 여배우로서는 쉽지 않은 삭발 투혼까지 발휘하며, 영화의 핵심 메시지를 자신의 연기로 온전히 소화해 많은 극찬을 받았다. 이 같은 열연으로 1989년 모스크바 국제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다시 한 번 강수연의 이름을 세계에 알렸다.
여인천하

[여인천하]는 영화배우 강수연이 근 20년 만에 TV로 돌아와 많은 화제를 모은 작품이다. 1980년대만 해도 강수연은 KBS 드라마 [고교생 일기]를 비롯해 많은 TV 드라마에 출연했다. 이후 스크린 출연에 주력하며 TV 출연이 뜸했는데, 사극 [여인천하]로 오랜만에 안방극장에 돌아왔다. 여기서 강수연은 미천한 신분에서 천하를 호령할 실권을 잡은 주인공 정난정 역을 맡아 남다른 카리스마를 선보였다. 이야기의 판도를 뒤집는 일종의 킹메이커 같은 역할로 드라마의 재미를 책임졌다. 20년 만에 TV로 복귀했지만, 전혀 어색함 없이 자신의 연기를 발휘했고, 덕분에 [여인천하]는 방영 내내 월화 안방극장 시청률 1위를 거의 놓치지 않았다. 그 결과 2001년 SBS 연기대상에서 문정왕후 역을 맡은 전인화와 공동 대상을 받으며 [여인천하]의 신드롬을 이어갔다.
정이

2013년 단편영화 [주리] 이후 9년 만에 배우 강수연의 스크린 복귀작으로 관심을 끈 영화 [정이]. 안타깝게도 이 작품이 강수연 배우의 마지막 유작이 되었다. [부산행], [반도] 연상호 감독이 연출한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로, 기후변화로 더 이상 지구에서 살기 힘들어진 인류가 만든 피난처 쉘터에서 내전이 일어난 22세기, 승리의 열쇠가 될 전설의 용병 ‘정이’의 뇌복제 로봇을 성공시키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강수연은 뇌복제 및 AI 기술을 개발하는 연구소의 팀장인 서현 역을 맡았다. 연상호 감독은 “현장에서 단역 배우부터 스태프를 다 챙기는 좋은 분”이었다며 강수연 배우와 함께 작업한 소감을 말하면서도, “후반 작업이 많이 남아서 완성본을 보여드리지 못한 점이 아쉽다”라며 안타까운 마음을 여러 인터뷰를 통해 밝혔다. 배우 강수연의 유작인 [정이]는 올해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될 예정이다. 이제 우리 곁에 없지만, 배우 강수연의 연기 열정과 한국영화에 대한 사랑은 그가 남긴 많은 작품을 통해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