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동기

이미지: 유니버설 픽쳐스

젊은 시절, 우리는 언제나 사랑을 정의하려 한다. 내게 있어 사랑이 무엇인지 늘 갈구하고 이를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당시엔 그걸 당연하게 여겼고, 그렇게 청춘을 사랑의 그림자로 덧씌우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달리 생각하면 사실 어디에서도, 또 누구에게도 그렇게 배운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어쩌면 그건 자기만의 틀을 갖춰 나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이런 성숙의 과정을 거쳐 현재에 이르렀다. 물론 잘 익은 듯 다 자란 모습이지만 여전히 서툴거나 철이 덜 든 모양새다. 시대를 대표하는 X세대든 현재의 MZ세대든 사랑은 그렇게 정의되어 간다. 시대를 감싸 안은 노래 가사를 살펴보면 항상 ‘사랑’이 껌딱지처럼 붙어 다니는 걸 볼 수 있다. 지나고 보면, 그게 청춘이고 추억이었기 때문이다.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 [리코리쉬 피자](2021) 속 두 남녀도 이와 마찬가지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면서도, 나이 차이에서 오는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의식한 듯 서로를 애써 밀어낸다. 당연히 둘은 적절한 거리를 두고 내면에 숨겨둔 밀고 당기기를 즐기는 모습이다. 그러니까 그들은 자신의 청춘 속에 사랑을 자기 방식대로 정의하고 있는 거다. 개리(쿠퍼 호프만)는 연기자다. 다양한 형태의 가면을 쓰고 있는 그는 무대 위에서 다채로운 인생을 겪은 만큼, 자신의 삶을 일찍 정의하려 나선다. 개리에 비해 불안한 이십 대의 청춘을 스쳐 지나가는 알라나(알라나 하임)는 아직 자신을 사회 속에 드러내는 데 적응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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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울리지 않을 것만 같은 두 사람의 조합은 꽤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이는 청춘의 도전으로 비치기도, 한편으로 불안한 삶의 연속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여하튼 두 사람은 아직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 결국 이들은 관객에게 청춘을 대변하는 삶의 자화상을 주장하고 나선다. ‘자화상’이란 화가에게 삶의 의미와 가치, 살아온 다양한 굴곡과 역경을 모두 포함하는 말이다. 그러니 이제 첫 발걸음을 내딛는 젊은 청춘에게 ‘자화상’이란 단어가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개리와 알라나는 그들에게 알맞은 자화상을 그리기 위해 열심히 노력할 줄 안다. 굵고 진한 연필을 손에 쥐고, 그렸다가 다시 지우고 또다시 색칠하는 행위의 반복은 이들의 이야기를 즐기는 관객에게 좋은 동기부여가 되는 듯하다.

개리는 줄곧 알라나를 가만히 놔두질 않는데, 자신에게 어울릴 거로 생각했던 그가 항상 자신의 시선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붙잡고 싶지만, 쉽게 잡히지 않는 그의 존재는 개리에게 새로운 가슴앓이를 안겨준다. 그야말로 청춘의 한가운데에 놓인 사랑의 아픔을 삶의 깊숙이 새기고 있다 고나 할까. 그렇다면 알라나의 시선은 어떨까? 그에게 개리는 아닌 걸 알면서도 쉽게 놓지 못하는 ‘계륵’이다. 하지만 망설이는 자신을 부정하는 모습을 발견하는 순간, 그는 또 다른 자신의 모습에 괴로워한다. 그게 사랑이고 청춘이란 사실을 이들은 조금씩 그리고 아주 천천히 깨달아간다. 긴 러닝타임을 채운 두 사람의 이러한 밀고 당기기는 마치 서로가 ‘거울’을 바라보듯 자신을 되돌아보는 계기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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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리는 동생에게 평생 함께할 사람을 만났다고 자신 있게 단언할 만큼, 알라나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자신에게 제대로 된 시선을 내어주지 않는 알리나를 놓고 그는 계속해서 흔들리고 또 계속해서 알리나를 흔들어댄다. 이는 투정을 부리는 게 아닌,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그를 통해 자신의 어리고 여린 모습을 바라보게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라나의 입장은 이와 반대다. 그는 언제나 커다란 꿈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도 개리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사진 촬영 보조 역할만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한 자신감 결여가 언제나 자신을 옭매고 있음을 인정하는 모습이다. 그러니 무슨 일이든 자신 있게 도전하고 변화하는 개리를 보면서 현실을 부정하는 나약한 자신이 미웠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두 사람의 이야기는 단지 청춘의 시기를 거치며 사랑과 성장을 깨닫는 삶의 이정표를 내세운 영화와는 조금 다른 경험담을 들려준다. 그들이 만들고 나누는 여러 사건과 대화는 얼핏 성장 드라마의 공식을 따르는 듯 보여도, 한편으로 편향적이고 지나치게 겉을 맴도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어쩌면 이 영화는 청춘의 사랑과 성장에만 초점을 맞춘 꽤 익숙한 이야기로만 받아들이기엔 아까운 작품이 아닐 수 없다. 그건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만이 꺼낼 수 있는 독특한 과거의 흔적을 녹여 놓고 있기 때문일 거다. 이러한 부분은 알라나가 배우가 되고자 찾아갔던 한 오디션에서 잭 홀든(숀 펜)이 그를 ‘그레이스 켈리’로 수식하며 자신이 과거에 출연한 영화 [도곡리 다리]의 추억을 좇는 부분에서 아주 잘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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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마크 롭슨 감독의 영화 [원한의 도곡리 다리](1954)의 흔적을 담아낸 몇몇 장면은 감독이 애써 남겨놓은 관객을 위한 배려가 아닐까 싶다. 그야말로 깊숙하진 않아도 자신과 관객들이 서로 나눌 수 있는 하나의 매개체로 자리하는 측면에서 그렇다. 이러한 부분은 주인공인 두 사람을 비롯해 영화 속 여러 인물과 사건들이 실제 현실을 담아내는 자양분이 됐다. 결국 이 영화가 추구하는 건 단지, 서사 하나에 집착하는 게 아닌 그때 우리가 느꼈던 그 기분, 그 사소한 지나침마저도 우리를 성장하게 만들어줬다는 진한 메시지에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두 사람이 제대로 된 스토리 리더를 자처하고 있는 건 당연하다. 개리는 겉보기에 또래 친구들보다 빨리 성장한 모습이다. 일찍 사회에 진출해 자신의 성장을 스스로 도모했다고 볼 수 있다. 그 모습이 어느 순간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게 만든다.

반대로 알라나는 불안한 이십 대의 청춘을 걷고 있다. 이십 대의 성장에 비해 자신의 방향을 채 잡지 못하고 방황한다. 그러니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하는 모습은 마치 ‘거울’을 바라보고 있는 것과도 같다. 원래 거울은 자기 본연의 모습을 비춰주는 도구이지만, 여기서는 두 사람의 역할이 이를 대신한다. 결국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은 서로를 통해 비춰본 자신의 내면이다. 그래서 서로를 위한 역할과 목적은 흡사 그들 청춘이 나아갈 지향점을 그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처럼, 개리는 일찍 성장한 자아에 비해 정신적 방황을 겪고 있으며, 알라나는 그를 통해 현실적 방황에서 벗어나려 애쓰는 모습을 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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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소용돌이에 세차게 흔들리는 두 사람은 이 때문에 서로를 필요로 하고, 둘이 함께할 때 제대로 된 삶의 근원적 이유와 목적을 찾게 된다.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은 이를 남녀의 그것을 빌려 ‘사랑’이라는 조건의 대명사로 묘사하지만, 실상 이는 표면적인 겉핥기에 지나지 않고 오히려 그의 메시지는 영화의 후반부에 다다르며 더욱 또렷해지고 분명해진다. 바로 경계에 놓여있는 삶이 더욱 굵고 진한 흔적을 남길 수 있다는 사실 말이다. 흔들리지 않은 흔적은 얕고 좁지만, 한 번이라도 강하게 흔들린 그것의 그림자는 무엇보다 넓고 진하다. 우리의 청춘도 분명 그러할 거다. 누구보다 진하게 사랑하고 누구보다 강렬하게 도전하며 누구보다 열심히 하루를 새기는 또렷한 하루의 흔적. 이쯤 되면, 영화의 제목인 ‘리코리쉬 피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해진다.

미 캘리포니아에 있던 레코드 가게로 잘 알려진 이 이름은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에겐 하나의 향수 그 자체였다. LP판을 뜻하는 이 의미는 감독에게 다양한 선율의 조화로 아름다운 음악이 완성되고, 다양한 재료로 피자의 완성도를 높이는 것처럼, 그의 삶이 조화를 이뤄가는 하나의 과정을 거치고 있음을 전한다. 누구에게나 삶은 그렇다. 누구보다 뜨겁게 달궈지고 무엇보다 차갑게 식어가는 것. 그 경계의 조화가 비로소 진정한 삶을 이뤄낸다. 세차게 흔들리는 경계에 서 있는 청춘의 이 순간, 지금 이 순간이 우리가 삶을 정의하고 나 자신이 주체가 되는 방향을 증명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