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신동욱

‘상계동 올림픽’, ‘두 개의 문’을 통해 바라본 한국 다큐멘터리 영화의 철거 트라우마

이미지: 푸른영상

OTT 플랫폼을 뒤적거리다 만난 두 작품 [집의 시간들](라야, 2017)과 [봉명주공](김기성, 2020). 제목의 부드러움과는 다르게 예사로 볼 영화가 아니다. 우리나라 다큐멘터리 영화는 30년 넘는 영화사 속에서 주거지 상실 문제를 끊임없이 소환했다. 그리고 많은 담론을 제시하며 작품 관람 그 이상의 생각할 거리를 건넸다. 다큐멘터리 영화 태동기에 중요한 작품 중 하나로 반드시 손꼽히는 [상계동 올림픽](김동원, 1988)은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당시 정치권력이 상계동 일대 노후 주거지역 주민들을 상대로 철거 작업을 강행한 현장에서 주민들이 연대하고 투쟁하며 흘린 피땀을 기록한 영화다.

그런가 하면 탐사 다큐멘터리 [두 개의 문](김지유, 홍일란, 2011)도 2010년 서울 용산 4구역 철거 현장에서 발생한 화재가 인명 피해로 이어진 참사 원인을 살피는 작품이다. 요컨대 [상계동 올림픽]과 [두 개의 문] 두 작품은 엄혹한 시기에 관객을 만나 공권력에 의한 공동체 붕괴 또는 해산을 비장하게 지적했다. 차마 추억이 되지 못한 기억을 아프게 헤집는 한국 다큐멘터리 영화의 ‘철거 트라우마’. 국내 다큐멘터리 영화사에서 아주 큰 비중을 차지하는 두 작품의 공통점이다. 특히 [두 개의 문]은 후에 이어진 ‘저널리즘 다큐멘터리’ 제작 유행을 촉발한 작품으로 평가 받는다.

그렇다면 왜 한국 다큐멘터리는 철거에 많은 시선을 집중시키고, 논제를 던지고 있을까? 비슷한 소재를 했지만 그 표현이 남달랐던 [집의 시간들]과 [봉명주공], 두 영화를 통해 그 의미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집의 시간들]은 웨이브 등에서 대여, 구매 서비스 중 / [봉명주공]은 웨이브, 티빙, 시리즈온, 시즌 등에서 대여 및 구매 서비스 중)

탄탄하게 쌓아 올린 ‘집의 시간들’

이미지: KT&G 상상마당

[집의 시간들]은 [발췌된 풍경], [우울한 경계] 등을 연출했던 라야 감독의 2017년 작품이다. 서울 끝자락의 둔촌주공아파트를 배경으로 이 곳에서 삶의 터전을 가꿨던 이들의 풍경을 그린다. 그러면서 오랫동안 미뤄진 재건축이 현실로 다가오면서 영화가 담아낸 소박했지만 아름다웠던 그 시간이 어떻게 사라지는 지를 의미 있게 그려낸다.

물론 [집의 시간들]을 보고 있는 동안에 당장 부동산이라든지 아파트 난개발 같은 사회 문제부터 떠오르는 것은 아니다. [집의 시간들]은 재개발을 앞둔 서울 둔촌주공아파트 주민들을 만나 사적 기억을 살펴 스크린 위에 올린 영화다. 그래서 영화는 처음부터 전에 살던 방의 냄새부터 맡게 해준다. 집 안에서부터 시작해 서서히 밖으로 나가기 시작하면 영화는 잘 만든 건축 다큐멘터리로 장르를 바꾼다. 주공아파트라는 단어가 전달하는 고상한 어감과는 달리 한 번은 살아보고 싶을 정도로 주변 환경과 멋들어지게 어우러진 아파트가 인상적이다.

여기에 인터뷰 사이의 여백과 안정적인 화면 구도, 또 연습한 것처럼 안정적인 인터뷰 톤과 목소리가 영화를 한층 단단하고 따뜻하게 만들어준다. 카메라 움직임을 최소화한 절제미도 돋보인다. 사진을 한 장 한 장 넘기는 효과를 주면서, 화면 속 피사체의 움직임을 극대화하는 연출력이다. 여기에 집의 자산 가치나 부동산 이야기가 낄 틈이 없다. [집의 시간들]은 집이라는 공간이 제공하는 주거 기능에 철저히 집중하는 작품이다. 하지만 이 작품이 그렇게 표현할수록 아련하고 씁쓸함이 드는 건 왜일까? 집의 시간이 점점 끝에 다가갈수록, 그 곳에 살았던 사람, 추억, 풍경 역시 사라짐의 슬픔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추억을 이식하는 ‘봉명주공’

이미지: (주)시네마달

다큐멘터리 [봉명주공]은 청주시 봉명동에 있는 독특한 형태의 저층 아파트 ‘봉명주공’과 그곳에 살던 사람들, 동물들, 그리고 식물들을 담아내며 집의 의미를 생태학적인 시선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김기정 감독의 첫 장편 다큐멘터리인 이 작품은 2021 제18회 서울국제환경영화제 한국환경영화상-대상과 관객심사단상을 수상하며, 사라지는 것에 대한 그리움을 말하는 동시에 그 존재의 이유를 힘주어 설명한다.

[봉명주공]에서 봉명주공아파트 단지 내 나무들을 부지런히 옮겨다 심는 인물들을 보여주는 이유가 있다. 말하자면 [봉명주공]이야말로 ‘옮겨진 나무’ 같은 영화다. 사람들이 심는 것은 나무라기보다 기억이다. 나무 심기가 아니라 기억을 이식하는 작업으로 보는 것이 좋다. 이 ‘옮겨진 나무’는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안내자 역할을 톡톡히 한다. 없어지고 사라질 것들을 촬영해 영화로 복원하는 시도가 영화 곳곳에서 엿보인다. 그 과정을 영화는 세심하게 담아내며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 아련한 감정들을 의미 있게 자아낸다.

[봉명주공]도 [집의 시간들]과 안팎만 바꿔 비슷하게 시작한다. [봉명주공]은 아파트 옆 버드나무가 톱에 베어 쓰러지는 모습으로부터 시작해 실내로 들어간다. 두 작품 모두 재건축을 눈앞에 둔 주공아파트를 다루고 있지만 [집의 시간들]이 집의 주거 기능에 좀 더 초점을 맞췄다면 [봉명주공]은 집을 둘러싼 환경을 통해 기억을 복원하려는 작품이다. 이 관점에서 보자면 [집의 시간들]이 실내에서, [봉명주공]이 실외에서부터 구성한 오프닝 시퀀스를 좀 더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살(buy)만한 집과 살만한(live) 집의 딜레마

이미지: KT&G 상상마당, (주)시네마달

[집의 시간들]과 [봉명주공]은 모두 공연히 건물 철거와 재건축을 소재로 삼고 있지만, [상계동 올림픽]과 [두 개의 문]과는 달리 떠나온 집, 혹은 고향을 생각하면서 감상에 젖기에도 그만인 영화다. 더 이상 한국 영화가 철거를 비장하고 아프게 다루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보인다. 정말 한국 다큐멘터리 영화는 ‘철거 트라우마’를 극복한 것일까.

정말 그랬으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부동산에 몰두하는 시대에 관객들을 만난 두 작품이 시사하는 점이 마냥 가볍지는 않은 것 같다. 두 영화의 개봉이 일종의 전조 증상이거나 경고 메시지는 아닐까도 생각해볼 만한 질문이다. 살(buy) 만한 집을 찾느라 살만한(live) 집 이야기는 쏙 들어가고, 집의 자산 가치에 몰두하는 사이 주거 기능을 상실한 공동체가 서서히 붕괴하는 현상이 사회적 질병이라면 말이다. 어쩌면 한국 다큐멘터리 영화의 철거 트라우마는, 주공 아파트에서 21세기 버전으로 단지 변주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