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동기

한 친구가 어느 날 책 한 구절을 스마트폰으로 찍어 보내준 적이 있다. 이게 구구절절 옳은 소리인지라 여태껏 내 가슴 속에 오래도록 남아있는 편이다. 19세기 프랑스 극작가 외젠 라비슈의 [페리숑씨의 여행]이라는 희극 얘기를 담고 있는 이 책은, 나도 모르게 어쩌면 내가 갖고 있을지도 모를 ‘페리숑 콤플렉스’를 극단적으로 주장한다. 세상에는 남에게 은혜를 입어도 고마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이 도움을 준 사람을 더 좋아하는 이가 많다는 것이다.
그 친구는 많은 이들이 이 콤플렉스에 빠져 살고 있으니 스트레스에 지친 내 마음을 정화하라는 뜻으로 보냈던 듯하다. 하지만 당시에 난 오히려 나 자신이 이 콤플렉스에 빠져 있던 게 아닌지, 한참동안 생각한 계기가 됐다. 여전히 모순의 일상에 빠져 있는 요즘, 아직도 내가 배워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다는 걸 깨닫고 산다. 사실 감사와 증오의 의미가 그 사이의 경계에 놓여 있음을 잘 나타내 주는 이 ‘페리숑 콤플렉스’는 어쩌면 성장의 흔적 속에 누구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곰곰이 생각하면, 내가 사람을 미워하고 증오하는 법을 배우게 된 건, 어릴 적 말다툼이 몸짓으로 변하기 시작했을 때부터였다. 부드러운 말투가 거칠게 바뀌고, 점차 언성이 올라가면서 어느 순간 손짓이 주먹다짐으로 바뀌었다. 아이들 싸움이 ‘칼로 물 베기’가 아닐까 싶지만, 사실 그 시절에 받게 되는 상처라는 건, 은근히 자신의 삶을 지배할 정도로 오래가는 법이다.
싸움 실력이 드러나고 쉽게 등수가 매겨지는 것 또한 하나의 이유가 될 테다. 남자들 사이에 이런 등수가 매겨지는 건 자존심 문제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는 또 다른 형태의 기억을 남기고 또 다른 감정을 야기하게 된다. 그게 상대에 대한 미움, 증오 뭐 이런 단어들로 수식된다면 너무 거창할지 몰라도, 알고 보면 사회에서 벌어지는 흔한 사건 사고도 이러한 사소한 단어에서부터 시작되는 경우가 많으니 말이다. 결국, 이 사회가 갖고 있는 하나의 병폐는 우리 모두가 마음속에 가진 지나친 과거로부터의 흔적에서 이어져 왔다고 해도 무방할 거다.

영화 [쏘우](2004)가 안겨주는 살인게임에 대한 해석의 미학은 앞에서 언급한 미움, 증오 등의 단어에서 기인한 게 아니다. 오히려 이를 통해 잃어버린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 그 자체에서 시작하고 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영화는 단순히 살인마 직쏘의 살인게임을 통해, ‘공포’나 ‘잔인’의 키워드를 제시하지 않고, 이를 ‘유희’로 받아들이게끔 만드는 다른 차원의 시선에 초점을 맞춘다.
즉, 직쏘는 살인 이전에 하나의 ‘규칙’을 전제로 내세우는데, 이 규칙은 자신의 살인 행위 이전에 이를 정당화하기 위한 하나의 근거를 들이미는 형태를 취한다. 이른바 내가 살인을 시작할건데 나름의 이유가 있으니 이는 정당하다는 풀이다. 이는 영화 [브이 포 벤데타](2006)의 ‘브이(V)’나, 혹은 우리나라의 고전 주인공인 ‘홍길동’의 행위 및 근거와는 분명 다른 차원이다. 이들이 사적인 영역을 공적인 부분으로 풀어내고 타인의 영역을 자신의 부분으로 가져온데 비해, 그가 제시한 영역은 분명 이와는 다른 경계를 드러내고 있으니 말이다.

그가 던지는 질문은 단순한 게임이 아닌 생(生)과 사(死)를 결정짓는 아찔한 순간을 안겨주기도 하고, 또 그 이면에는 찰나의 무게와 철학을 투영해 관객조차 선택의 범위를 고려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영화의 재미는 여기에 존재한다. 이 점이 바로 영화 [스파이럴](2021)을 [쏘우]와는 다른 시각으로 조명받게 만드는 이유가 아닐까.
[스파이럴]은 [쏘우]의 배경을 차용하고 있지만, [쏘우]와는 확실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작품이다. 어떤 선택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누가 무엇 때문에 왜 이런 일을 벌이고 있는지, 사건의 원인과 의미가 아닌 ‘구성’에 보다 초점을 맞춘다. 앞에서 언급한 게임의 이면성 대신에 일반적인 스릴러의 그것을 차용해 지금까지 오랫동안 [쏘우]가 만들어 온 장점을 스스로 파괴시켜 버리고 만다. 그래서 이 작품은 직쏘의 개성 강한 영역 대신, 삶의 무게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타인에 대한 증오와 분노, 즉 복수를 위한 게임만을 조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대와 달리 아쉬움이 상당한 편이다.
여기에 직쏘만의 창조의 영역인 그의 게임이 제대로 된 서사를 갖지 못한 채, 그저 단순한 살인도구로 전락했다는 점도 아쉬움에 한 몫을 더하는 부분이다. 어떤 선택을 하느냐의 문제가 내 과오와 삶의 자기반성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그저 삶과 죽음의 경계만을 엮어내고 있어서다. 영화를 보는 내내 과거의 흔적을 찾고자 했던 관객의 기대는 단순한 스릴러의 법칙 찾기로 이어져, 영화가 제시한 서사에 더 이상 힘을 보태지 못한다. 그런데도 영화 [스파이럴]은 우리에게 익숙한 한 가지 메시지만은 놓치지 않는다. 바로 복수로 이어지는 감정이 만든, 상처를 어루만지는 ‘회한(悔恨)’ 말이다.
서두에서 언급한 감사와 증오, 그러니까 사람과 사람 사이에 발생하는 소통의 과정에서 하나의 감정이 만들어지고, 이는 한 순간에 발생하는 여러 입체적인 요인을 포함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영화 [스파이럴]은 [쏘우]의 헤리티지를 철저히 무시하고 이에 대한 기대치를 반감시켜 아쉬움이 가득하지만, 그 자체만으로 영화적인 무게는 확보한 작품이 아닐까 싶다.

‘쏘우’라는 제목을 직접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From the Book of Saw’라는 부제를 내세운 것도 전작에 대한 예우는 갖춘 셈이다. 또 다른 게임의 형식을 보여줬으니 이 또한 충분한 재미는 형성했고, 더군다나 잊힌 전설을 다시 떠올리게 만든 향수 또한 빠지지 않았다. ‘복고’가 판치는 요즘의 문화를 생각한다면 이도 결코 나쁘진 않을 것이다. 90~2000년대의 화려했던 문화적 폭발력을 거친 세대로서 시대의 자화상을 늘 그리워하곤 하는데, 그 자체가 현재를 완전히 되돌릴 순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기대’보다 남아있는 ‘흔적’에 좀 더 관심을 둔다면 그 그리움이 조금이나마 치유될 수 있지 않을까. ‘페리숑 콤플렉스’도 이와 마찬가지다. 각자의 삶이 거대한 틀을 갖고 있다면, 서로에게 미치는 손길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차라리 그 사람이 내게 미친 ‘흔적’을 훑어낼 수 있다면 그게 못 다한 내 자화상을 채워주고 있는 게 아닐까. 어쩌면 우리의 삶도 영화 [스파이럴]이 던진 그 객관적인 시선을 덧대어볼 수 있으리라. 감정이 앞서면 시선이 흐트러지고 내가 살아가는 이유가 흔들리는 경우가 더러 있다. 모든 걸 유희(遊戲)의 시선에서 이해하고 응시할 때 삶은 이전과 다른 색깔을 비추게 된다. 직쏘의 게임은 여전히 유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