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동기

살다 보면, 쉽게 풀리거나 해결되지 않는 난제를 마주할 때가 있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와 같이 난처한 상황을 접하는 건 흔하다. 때론 ‘외계인은 과연 존재할까.’처럼 거대한 인류 존재론적 문제에 대한 제기도 있을 수 있다. 여기에 남성과 여성의 신비로운 차이, 혹은 한참 유행 중인 MBTI 성격 분류에 이르기까지. 세상은 온통 확실히 정의하지 못하고 우리가 모르는 것 투성이에 싸여 있다. 그러니 의외로 세상은 외면받고 살아가는, 가려진 부분이 필연적으로 존재한다는 얘기다. 자유로이 마주하고 이동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과는 달리, 그 자유에 얽매어 지나치게 무언가에 사로잡힌 것들이 상당수 있다는 얘기와도 같다.
이는 어쩌면 사상이 될 수도, 사랑으로 표현될 수도 있으며, 혹은 도전과 용기로 나타나는 성공과 실패의 구분이 될 수도 있을 거다. 어쨌건, 이 모든 걸 다 아우르고 살아가기엔 개개인의 삶은 참 고달프다. 아마도 이를 영상에 다 담으려면 2시간의 러닝타임은 고사하고 몇 날 며칠을 넘겨도 쉽게 표현하고 또 이해하기 어렵지 않을까 싶다. 영화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2022)를 마주할 때 타이틀이 가리키는 ‘이상한 나라’에 대한 정의를 우선적으로 챙겨야 하는 이유다.

타이틀과 포스터의 중요성을 항상 강조해온 입장에서는, 이 ‘이상한 나라’가 가진 의미를 제대로 해석하는 게 크나큰 숙제가 아닐 수 없다. 사실 이조차 정확하게 그 속내를 꿰뚫을 순 없지만 아마도 박동훈 감독은 표면적으로는 사회의 부조리와 여기에 휩쓸리는 세태에 대한 풍자를, 그리고 내면적으로는 주인공 리학성(최민식 분)이 가진, 외면받고 있는 공간과 영역에 대한 고민을 함께 언급하고 싶어 했던 걸로 보인다. 이는 답을 찾기보다 제대로 된 풀이 과정을 찾아가는 게 중요한 ‘수학자’로서의 삶을 외면하는 또 다른 ‘이상한 나라’에 대한 반어적인 표현이 될 것만 같다.
누구나 쉽게 이해하듯 이 영화는 흡사 [뷰티풀 마인드](2001)의 구성을 닮고 그 분위기를 깊이 있게 쏟아낸다. 하지만 존 내쉬(러셀 크로우 분)가 겪는 내면적 심연까지 기웃거리는 데에는 아무래도 한계를 내비치는 모습이다. 한국식 정서의 풀이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런데도 사소한 하나마저도 숫자를 이용해 복잡하게 얽힌 서사 관계를 좀 더 쉽게 드러냈다면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사실 이건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개인적인 측면의 서사를 거시적인 영역으로 확장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취해야 할 구성과 역할이었다는 생각 때문이다.

다른 시선에선 가르침과 배움이 오가는 그들 사이의 관계를 놓고, 영화 [굿 윌 헌팅](1997)의 그것을 찾게 되기도 한다. 이 또한 서사의 주가 되는 영역을 더욱 눈여겨보길 원하는 측면에서, 여전히 앞에서 [뷰티풀 마인드]와 결을 같이 하지 않을 수 없다. 어쨌든 이러한 시선은 어떤 영역에서는 계속해서 따라다니는 꼬리표가 될 것만 같다. 탈북 수학자 리학성의 내면은 아들을 잃은 슬픔으로 인해 학문적 거리를 자초하고 있었고, 이는 분명 방황에 가깝지만 화면 속에서 그 깊이까지 세심하게 다루진 못해서다.
여기서 한지우(김동휘 분)와의 관계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는데, 전반적으로 [굿 윌 헌팅]에서의 ‘윌 헌팅’과 ‘숀 맥과이어’ 사이에 오가는 세심한 감정선까지 읽어내기엔 다소 아쉽다. 감정 변화가 치밀하게 이어지지 못하고 표현력도 폭발력도 여전히 동요가 일지 않기 때문이라고 해두자. 이를 고려한다면, 영화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는 이들 모두의 겉면을 조금씩 훑으며 주제를 소극적으로 다루는데 치우친 작품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 부분만큼은 그저 좇아가는데 급급한 게 아닌, 이야기의 재미를 더하는 요소를 담아내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게 바로 영화의 도입부에서 보여준 수학적 공간의 악보 씬이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는 앞에서 언급한 두 작품보다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2007)의 구성과 연출을 좀 더 찾을 수 있다. 수학 공식을 파고들며 빠른 속도로 주인공의 시선을 좇는 첫 장면은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에서의 피아노 대결과 흡사 닮았다. 카메라 시선의 속도와 방향이 그들 피아노 대결의 클라이맥스에서 보여준 건반 씬을 재구성하고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피아노 내부를 훑으며 그들 감정이 오가는 움직임과 선율을 있는 그대로 표출하는 바로 그 장면 말이다. 오히려 촬영기법 측면에서는 직접적인 오마주를 드러낸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이러한 성격이 비단 이 장면뿐이라면 얘기조차 꺼내지 않았다. ‘수학’ 그 자체가 리학성과 한지우, 두 인물 사이에 교감을 생성하는 목적과 수단으로 작용한다면,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에서도 ‘음악’이 이를 표현하고 담아내는 그것이 된다. 그러니까 굳이 이해하자면,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는 수학 그 자체를 들여다보는 게 아닌 그것을 구성하고 풀이하는 공식, 그 공식이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를 강조한다. [말할 수 없는 비밀] 또한 음악이 가진 선율에 상륜(주걸륜 분)과 샤오위(계륜미 분) 두 인물의 감정을 집어넣어 이를 풀어내는 공식을 담아내고 있다는 얘기다.

영화 속에서 리학성은 “증명되지 않은 건 믿지 않는다.”라며 “그게 바로 수학자”라고 말한다. 이는 영화의 전반적인 메시지를 담아내는 장면이다. 다시 말해, 수학자에 대한 정의를 통해 사람들이 살아가는 공식을 받아들이고 삶에 주어진 문제를 이해하고 풀어가는 형태를 갖춰간다는 거다. 이는 타이틀에 대한 이중적인 의미와도 연결된다. ‘이상한 나라’는 사람들이 거리를 두고 쳐다보지 않는 곳, 어둡고 외로운 것을 견뎌야 한다는 점에 ‘수학’이라는 공식이 주는 희망의 해답과 연결된다고 할 수 있겠다.
자주 등장하는 ‘리만 가설’ 또한 여러 영화 속 난제 해결 과정을 통해 인물이 가진 상처를 묘사한 바 있지만, 여기서는 풀어야 할 난제가 있다는 사실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모습이다. 개개인이 가진 아픔을 견디고 다시 용기를 내 도전하고, 그 과정이 ‘수학’이 가진 이미지를 형성한다.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외로운 길을 왜 가야만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주기도 한다. 이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답이 영화 속에서 집중적으로 조명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왜 하필 거북이를 기르고, 왜 하필 딸기우유를 선택했을까? 거북이는 진득하니 한 방향으로 나아갈 줄 알고, 딸기는 열매를 맺기 위해 많은 관심과 손길, 즉 도전과 실패를 반복해야만 결실을 본다. 이쯤 되면 우리도 어제의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다시 딸기우유 한 모금을 마실 용기가 생기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