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신동욱

이미지: (주)엣나인필름

‘성소수자 영화’라는 수식어는 오히려 그들을 더욱 ‘소수’ 쪽으로만 강화되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말이 주는 힘이라는 게 그렇다. 말만으로 이미 그들은 소수로 규정돼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들을 바라보는 시각에도 이미 다수가 가지는 힘 또는 폭력, 또는 부담스러운 관심 내지는 사랑을 빙자한 동정 등이 내포돼 있다.

그래서 ‘성소수자를 다룬 영화’라는 소개만 들어도 이미 자기 취향이 아닌 분들께 부탁드린다. 다큐멘터리 영화 [모어](이일하, 2021)는 성소수자 영화로 유효하기만 한 작품은 아니다. 특히 당신이 삶의 가치를 잃고 방황하는 중이라면, 영화 [모어]는 삶이 모질기도 하지만, 또 얼마나 황홀하고 아름다운지 깨닫게 해주는 작품이다. 동시에 자신만의 정체성을 찾아 누가 뭐라고 해도 떳떳한 삶을 살아가라고 말해주는 영화다. 사회에서 배운 ‘올바름’이라는 기준을 잠시 내려놓으시고, 경험에 의한 파편적 지식도 일부로만 여기시고, 이번 한 번만이라도 제대로 그들의 외모가 아닌 삶을 보자고 제안한다.

털 달린 영화 ‘모어’

이미지: (주)엣나인필름

다큐멘터리 영화 [모어]는 세상의 규정에 저항하고 매일 새로운 아름다움을 좇으며 살아가는 아티스트 모어의 삶을 화려한 퍼포먼스와 감각적인 음악으로 담은 작품이다. [울보 권투부](2015), [카운터스](2018) 등을 연출했던 이일하 감독이 모어의 이야기를 카메라에 담았다.

만약 영화 [모어]가 성소수자를 앞세워 속된 말로 ‘감성 팔이’를 하거나 대충 모양새만 갖춰 주목받으려는 다큐멘터리였으면 필자는 지체없이 혹평을 날렸을 것이다. 연출력에 자신이 없어서인지 자극적인 소재 찾기에만 골몰하는 감독 또는 작품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을 다룬 다섯 편의 다큐멘터리 중 몇 편 같은 식이다. 이후 진보 정치인들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들이 차례로 개봉했는데 그마저도 이 나쁜 방식을 그대로 답습해버렸다. 물론 이건 인물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영화 완성도에 대한 평가를 말하는 것이다. 둘을 구분할 수 있어야 올바른 영화 감상이 가능하다. 소재주의 더하기 감성 팔이 작품은 핵심을 꿰뚫지 못하고 메시지의 한계를 노출할 때가 많다. 관객들도 이제 안다. 그런 식으로는 영화 속 주인공 또는 촬영 대상을 상업적으로 이용한 것 밖에는 되지 않는다는 것을.

[모어]는 그런 영화가 아니라서 다행이며, 마음 놓고 추천할 수 있다. [모어]를 뮤지컬 다큐멘터리 영화라고 하는 이일하 감독의 소개에 “그런 영화가 전에 없었나?” 하며 곰곰이 생각해봐도 선뜻 선례가 떠오르지 않는다. 음악과 춤을 적당한 곳에 넣어 보기 좋게 편집한 수준이 아니다. 음악과 춤이 전면에 배치돼 이미지와 서사를 동시에 끌고 간다. 보기 드문 시도다. 그런 점에서 [모어]는 선구자 칭호까지는 물론 민망하지만, 한국 다큐멘터리 영화가 간만에 시도한 파격 또는 새로움 정도로 평가하기에 모자라지 않았다. 영화가 극중 주인공을 많이 닮았다. 찾아도 잘 없고, 드문 걸 내놓았으니. 몇몇 영화 팬들에게는 낯설어 보이지만, 그만큼 정체성도 뚜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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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어]는 뻔한 인물 다큐멘터리 관습을 따르지 않는다. 물론 이 영화는 모지민이라는 강력한 캐릭터가 이야기를 끌고 가는 작품이다. 다만 성소수자라는 희귀성과 차별성에 안일하게 의지한 채 인터뷰와 예상 가능한 인물들을 만나는 정도의 연출력이었다면 주목받기 힘든 영화였을 것이다. 이 영화는 작품 해석에 이르는 다양한 텍스트를 풍부하게 제공하고 있다. 주인공이 극적으로 읽어 내려가는 내레이션부터 과장된 화장과 어울리지 않는 로케이션, 모어의 춤과 노래 그리고 주변인들의 인터뷰 등이다. 영화에 내포된 풍부한 텍스트들은 대상을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을 살필 수 있게 해주고 관객들이 자유롭게 작품을 사유할 공간을 만들어준다.

말 그대로 스크린을 장악하는 모어의 춤 실력 그리고 내레이션 이야기는 따로 조금 더 해야 한다. [모어]를 보고 황홀함을 느끼는 감상은 모어가 살아낸 인생이 충분히 관객들에게 흡수된 다음 그의 춤과 맞닿으면서 극적으로 발생한다. 극단을 가정하고 가족들에게 쓴 편지를 내레이션으로 읽어 내려가는 장면은 참 모질다. 살아있는 모어를 보고 있는데, 죽은 [조커](토드 필립스, 2019)가 생각난다. 성소수자에 대한 감독의 생각과 의도가 선명해 정체성이 뚜렷하면서도 춤과 가족이라는 인류 보편적 언어를 선택했기 때문에, [모어]는 평단과 관객 모두에게 호평 받을 수 있었다.

삶은 “무기징역 불행”이 아니다

이미지: (주)엣나인필름

이 영화 감상의 끝에서 굳이 누군가의 불행을 언급하고 싶지 않다. 주인공 모어는 충분히, 일단 적어도 나보다 행복하다. 정작 우리들이야말로 사회가 정한 내 모습이 아닌, 진짜 나 다운 모습을 찾아야 한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무기징역 불행”이 오히려 모어 쪽에 해당하는 말이 아닐 수도 있다.

[모어]를 다 보고 나서도 편견이 깨지지 않았다면, 그건 아무리 해도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몫이 아니니 그럼 마지막 부탁 하나만 간절히 드리겠다. 영화에서 무언가를 얻지 못한 채 삶으로 복귀하시더라도, 그들에게 함부로 돌을 던지지는 말아 달라. 물론 돌 맞을 모어도 아프겠지만 반드시 그래서 드리는 부탁만은 아니다. 주인공 모어야 자신의 삶이 “내가 선택하지 않은 무기징역 불행”이라고 하지만 내가 봤을 땐 좀 반대인 것 같기도 하기 때문이다.

한창 행복함만 누리고 살아도 너무 짧아 아까운 인생에, 광기라는 말이 어울리는 분노에 자발적으로 휩싸여 다른 사람 인생에까지 기어이 손가락질해야 직성이 풀리는 삶이 진심으로 아깝고 안타깝다. 진짜로 그러지 말자. 우리 각자 더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즐거운 마음으로 찾아 떠나가면 그걸로 충분하다. 평가하지 말아 달라. 무엇이든,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달라.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기대를 투영하지 말아 달라. “이런 영화도 있구나” “저런 삶도 있구나”. 이렇게. 영화도? 모어도. 충분히 그럴 준비가 돼 있는데 말이 너무 많다면 그건 여전히 우리 사회가 성소수자에게 불편한 시선을 던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필자의 노파심, 또는 편견 때문으로 간단히 무시하면 좋겠다.

우리나라 예술 영재들만 들어간다는 학교에 모어가 입학했을 때 “너, 그 여성성 버려라”며 차디찬 말 내뱉었다는 그 선배. 발레리노 대신 발레리나가 되고 싶었던 모어가 마음에 들고 안 들고는 각자의 취향이겠지만 타고난 정체성을 어떻게 내버리라고 뺨까지 때릴 일이었을까. 당신, 제발 그 폭력성부터 버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