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신동욱

이미지: KT&G 상상마당

[땐뽀걸즈](이승문, 2017)를 볼 때마다 생각나는 은사님 한 분이 있다. 이 이야기를 하려면 초등학교 4학년 때로 돌아가야 한다. 가을 운동회 하는 학교가 아직 있는지 모르겠다. 다른 건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데, 유독 그 해 운동회에서 장애물달리기를 한 기억만 남아 있다. 1등을 했냐 하면 물론 1등을 하기는 했는데, 그래서 20년 넘게 기억하는 일은 아니다. 앞서 달리던 친구가 결승선 바로 앞에서 넘어지는 바람에 어부지리로 차지한 1등이었다. 트랙 밖에 계시던 부모님은 친구가 넘어지자 내가 1등할 기회라며 나더러 내처 달리라고 응원하셨고, 그 응원에 힘입어 더욱 힘차게 달려 결승선을 통과해 손등에 1등 도장을 받고 필기구 세트와 공책을 가장 많이 받았었다. 기뻐했지만 결과적으로 철없는 짓이었다.

나중에야 알게 된 이야기지만, 앞서 달리다 넘어진 내 친구에게는 운동회에 와 줄 가족이 없었다. 일용직인 부친께서는 운동회에도 일을 나가셨다. 어떤 사유인지 모르지만 그 친구 어려서부터 모친과도 같이 살지 않았다고 했다. 6명 중 6등으로 들어와 6등 도장을 손등에 찍은 친구가 얼마나 상심했을지를 가끔 어렴풋이 헤아려본다. 상품이 중요한 게 아니다. 승부욕도 있고 운동도 잘 하던 친구였는데, 그 친구 넘어져서 들었던 소리가 하필 우리 부모님 응원 소리였다. 같은 처지의 나였다면 정말 서럽게 울었을 것 같아 지금도 괜히 미안하다. 어린 나이에 자존심 많이 상했을 것 같다.

그때 그 친구에게 수저통을 선물하셨던 선생님이 학창시절 기억 속에 손꼽는 은사님이다. 학생 하나하나에게 마음을 섬세하게 쓰셨던 선생님. 친구는 운동회가 끝나고 교실에 들어와 남은 공책 몇 권과 함께 그 수저통을 선생님께 받고 친구들에게 박수까지 받으며 환한 웃음을 되찾았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수저통이 아마 2등 상품이었을 것이다. 당시 우리는 말그대로 자기 밥숟가락도 못 챙기고 곧잘 잃어버리는 개구쟁이들이었으므로 당시 수저통은 작은 선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사실 수저통이 2등 상품이고 큰 상품이고 작은 상품인 것은 거의 의미가 없다. [땐뽀걸즈]를 보면 안다. 애들 다 떡 하나씩 주고도 선생님 손에 들고 있던 떡 하나 마저 받아먹은 거제여상 이규호 선생님의 제자가 다른 것도 아닌 그 떡 하나를 기억하듯이 말이다.

선생님이 아니었으면 그 친구는 물론 나에게도 당시 기억이 추억하지 못할 만큼 미안한 날로만 남았을 것이다. 참 감사한 일이다. 그 수저통 물론 내가 받은 것도 아니었지만, 당시 은사님께서 베푸신 따뜻한 마음을 아직도 기억한다. 누군가 내게 ‘은사님 이야기를 해보라’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선생님이다. 구체적인 학창시절 속 상황이야 다르겠지만 대부분 비슷한 추억으로 은사님 몇 분 정도를 기억할 것이다. [땐뽀걸즈]가 TV 방영 후 극장판으로 개봉한 뒤 다시 드라마로 제작됐다는 것은, 많은 시청자와 관객들이 나와 비슷한 추억을 떠올리며 영화에서 다루는 사제지간의 의미에 공감했다는 뜻으로 본다.

이미지: KT&G 상상마당

[땐뽀걸즈]는 물론 감독이 은사를 회상하는 영화가 아니다. 2016년 이승문 PD는 지역 경제를 떠받들고 있는 조선업이 쇠락하는 현장을 담기 위해 무작정 거제도로 출발했다. 거제시 소재 조선소에서 구조조정이 한창이던 때였다. 30% 삭감했던 임금 수준을 다시 회복해달라며 노동자들이 집단 행동을 했다고 얼마 전까지 언론이 떠들썩하게 다루던 그 조선소다. 그곳에서 노동자들을 만나던 이PD는 조선소 구조조정 이야기를 전면에서 다루지 않고 관객들에게 우회해 전달하기로 연출 전략을 바꿨다. 거제여상 학생들을 만나고 나서부터다. 이PD는 거제여상 ‘땐스 스뽀츠’(줄여서 ‘땐뽀’)반 학생들 이야기 속에, 그들의 학부모인 조선소 노동자들의 표정을 조금 묻혔다. 현장 상황과 감독 역량에 따라 중심 소재와 주제 전달 방식을 순발력 있게 판단해 바꾸는 것은 다큐멘터리 제작 환경의 특징이다. 다만 이것이 장점이 되느냐 단점이 되느냐는 영화의 만듦새 그리고 촬영 대상을 대하는 감독의 시선에 전적으로 달려있다.

[땐뽀걸즈] 제작진은 학생들과 친하게 지냈다. 카메라와 학생들 사이의 물리적 거리만 봐도 알 수 있지만 그보다 확실한 증거는 두 개의 결정적인 시퀀스다. 하나는 소위 ‘귀신 이야기’ 시퀀스다. 밤늦게 연습실에 남아 댄스를 연습(춤 연습이라고 하면 이규호 선생님이 싫어한다)하다가 둘러앉아 야식을 먹으며 다같이 무서운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사실 영화의 큰 흐름과는 거의 상관이 없다. 학생들이 대회를 준비하며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도 아니고, 귀신 이야기가 거제 조선소와 맞닿아 있지도 않다. 그런데 이PD는 이 장면을 촬영하고서는 공포영화 한 장면처럼 웃기게 편집해 영화에 꽤 긴 시간을 할애해 포함시켰다. 이PD가 영화 촬영과 편집 과정에서 느낀 애틋한 감정이 고스란히 들어있는 장면이다. 스승과 제자가 격의 없이 어울리며 무서운 이야기를 하고 장난치며 노는, 이런 사랑스러운 광경을 자기가 직접 목격했다고 자랑하는 것 같다.

이미지: KT&G 상상마당

제작진과 학생들이 친하게 지냈다는 또 증거는 대회가 끝난 다음 시퀀스다. 학생들이 이규호 선생님께 선물을 준비했는데, 이 선물은 물론 스포일러라 구체적인 언급을 삼가겠지만 제작진 협조와 도움 없이는 만들기 힘든 선물이다. 이 두 장면 속에서 이규호 선생님은 각각 다른 이유로 운다. 이 두 장면은 감독과 제작진이 촬영 대상을 진심으로 대했기 때문에 나올 수 있었다. 요컨대 순발력이 필요한 다큐멘터리 제작 환경의 특징을 이PD는 장점으로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이규호 선생님에게는 학생들에게 했던 만큼 카메라를 가까이 갖다 대지 않았다. 선생님 이규호 이상으로 인물에 집중할 필요가 없었을 수도 있다.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래도 따져보자면 필요 이상으로 감상적인 다큐멘터리를 만들지는 않겠다는 뜻으로 보인다. 거제 조선 산업 상황이 여의치 않지만, 마냥 인물들을 우울하게만 찍지는 않겠다는 뜻이 거제여상 학생들을 통해 드러났듯이. 둘 사이에서 균형을 잡은 것이다. 이것을 의도했든 아니든.

이미지: KT&G 상상마당

 극장판 [땐뽀걸즈]는 내레이션 개입을 제한하고, 인터뷰도 보이스 오버로만 처리한다. 방송 다큐멘터리 성격을 극장판에서는 지우려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촬영부터 영화 장비를 사용했다 하니 충분히 짐작할 만한 대목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시장은 방송 인력의 유입과도 밀접한 관계 맺고 있다. 휴먼 다큐멘터리 제작 인력과 저널리즘 다큐멘터리 제작 인력 교차하며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계도 장르 다변화에 성공했다. [워낭소리](이충렬, 2009)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진모영, 2014) [자백](최승호, 2016) 등 작품들이 대표적이다. 같은 맥락에서 [땐뽀걸즈] 역시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사에서 차지하는 의미도 깊다. 잘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가 TV와 영화관 경계를 두지 않고 양쪽 모두에서, 시청자와 관객들에게 동시에 호소력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좋은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