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동기

보이지 않는 것에 시선을 묶어두는 게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알고 있다. 오랜 시간, 어두운 음영의 시기를 거쳤기에 따뜻한 관심과 차가운 시선의 영역이 어떤 것인지 조금이나마 이해하지 않나 싶다. 그래서 영화를 보며 특별한 순간을 간접 경험할 때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감정을 추스르려 노력하곤 한다. 영화 [이프 아이 스테이](2014)는 우리에게 익숙한 ‘떠나간 이’가 아닌, ‘남겨진 이’의 아픔을 조명해 화면에 담아냈다. 생각을 바꿔 죽은 게 얼마나 억울하고 가슴 아프겠냐마는, 그 슬픔마저도 죽은 이가 아닌 남겨진 이들의 몫이라는 얘기다. 이러한 시선도 영상의 표출도, 사실 충분히 공감 가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이외에도 장애인이 아닌 ‘장애인을 품은 이’를 바라보거나, 환자가 아닌 ‘간병인’의 삶을 살펴보는 것도 유사한 느낌을 얻게 될 거다. 영화에선 주연이 아닌 조연을 바라보는 시선조차 나름 유의미한 가치를 가지기 때문이다. 우리 삶의 내러티브는 비단 주인공 혼자서만 이끄는 게 아니다. 영화 [코다](2021)에서 루비(에밀리아 존스 분)는 코다(Children of Deaf Adults)의 삶을 살고 있는 중이다. 청각 장애가 있는 가족을 위해 그들의 입과 귀를 평생 대신해주는 거다. 분명 가치 있는 시간이지만, 그에게 이는 오랫동안 자신의 몸에 밴 생선 냄새처럼 언젠가 벗겨내야 할 냄새이기도 했다.

그런 루비가 평소 흠모해왔던 남자친구 마일스(퍼디아 월시-필로 분)를 따라 합창단에 발을 들였을 때, 어쩌면 이 영화는 영화 [와일드 로즈](2018)의 그것을 따르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가졌다. 젊은 시절, 실수로 전과 경력을 갖게 된 두 아이의 엄마 로즈(제시 버클리 분) 또한, 짜인 굴레의 삶에 답답함을 호소하고 자신의 노래를 통해 세상 밖으로 나가겠다는 꿈과 희망을 머금었기 때문이다. 만약, 루비 또한 꽉 막힌 삶의 돌파구를 찾고자, 그저 노래를 그 도구로 택하는 데 그치고 말았더라면 영화를 바라보는 개인적인 시선은 차갑기 그지없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영화가 안겨준 감동의 포인트는 과연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
그건 단지 청각장애 가족을 루비가 가진 장벽으로만 인식하게 만들지 않고, ‘소통’과 ‘가족’의 키워드를 동시에 강조하고자 노력한 여러 장면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합창단 테스트 당일, 친구들의 실력에 기가 죽어 무작정 그곳을 빠져나온 루비는 아무도 없는 호숫가를 찾아가 혼자 자신만의 노래를 부른다. 이날 음악 선생님 미스터V(에우헤니오 데르베스 분)는 자신의 생일을 축하해달라며 생일축하곡을 테스트 곡으로 정했었다. 하지만, 루비가 호숫가에 홀로 앉아 ‘해피 버스데이 투 유’를 소리 높였을 때 이는 마치 선생님이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한 생일 축하처럼 들려온다. 그동안의 오랜 노고를 위로해주는 따뜻한 손길의 그것으로 말이다.
영화는 이처럼 시작부터 이야기하고자 한 바를 분명하게 밝히고 나선다. 그리고 이를 쉽게 이해하게끔 표현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루비는 서로 쉽게 마주하지 못하는 이들 사이의 대화가 오직 자신만을 통해 원활한 소통이 이뤄진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은 그 자신에게 굉장한 압박감을 선사하는데, 감독 션 헤이더는 이의 표현을 통해 이러한 소통이 과연 올바른 의미를 담아내고 있는지, 우리는 과연 그들이 나누는 소통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에 물음표를 제기한다. 이 때문에 영화 속 루비는 노래를 통해 자신의 상황을 이해하고, 자신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를 충분히 고민하는 모습이다. 마일스와 함께 다이빙이 금지된 절벽에서 그것을 즐기며 그동안 금기해왔던 자신을 둘러싼 굴레를 벗어던지는 모습도 이러한 과정에 해당하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 루비의 가려진 의식은 이와 같은 반복된 행위를 통해 화면 속에서 꾸준히 표출된다. 미스터V가 처음 루비에게 건넨 말, “할 말이 없는 예쁜 목소리는 차고 넘쳐. 넌 할 말이 있니?”라고 했던 질문도, 그리고 평소 아빠, 오빠와 함께 새벽마다 해왔던 고기잡이에 어느 날 말없이 불쑥 나타나지 않았던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여기서 우린 영화가 향하는 시선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영화가 말하고 있는 건, 단지 청각장애로 인한 불통의 아픔과 그 환경에 놓인 한 소녀의 슬픔만이 아니란 걸 말이다. 오히려 감독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끊어져 있는 대화의 끈을 조명하며, 눈에 보이는 그리고 귀에 들리는 표면적인 연결보다, 개개인의 내면에 그 대화가 점차 내재화되어가는 과정이 더욱 중요한 것임을 주장한다.
이러한 메시지 전달에 귓가를 속삭이는 멜로디 하나하나 또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오랫동안 받아들이지 못했던 서로의 솔직한 마음을 비로소 끌어안게 되는 기제가 되기도 하고, 또 관객의 마음을 애틋하게 어루만져주는 요소로서도 그렇다. 학교 음악회에 참석한 아빠 프랭크(트로이 코처 분)와 엄마 재키(말리 매트린 분), 그리고 오빠 레오(다니엘 듀런트 분)가 눈에 보이지 않는 노랫소리에 귀 기울이지 못하다가, 어느 순간 율동과 더불어 사람들이 손뼉을 치는 모습에 눈을 뜨고는 조금씩 서서히 손을 맞춰가는 그 과정은, 관객의 시선을 절로 한곳에 모으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 마일스와 루비가 듀엣곡을 부를 때의 감정 고조는 이 영화가 관객에게 전하는 감동의 절정을 가리킨다. 설마 그 순간 세상의 모든 귀를 접어버린 채 그들만의 세상으로 관객들을 끌어안을 줄 누가 알았으랴.
그 아름다운 선율의 순간에 이 영화는 이의 존재를 정말 완벽하게 감춰버리고 만다. 그건 바로 우리가 아닌 그들의 시선으로 들어가 외쳐보는 것과 같은 거다. 그 순간의 전율과 감동을 귀가 아닌 눈에 듬뿍 담을 수 있게끔 말이다. 우리가 감히 이를 제대로 이해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도 역동적인 그 고요함을 과연 충분히 받아들였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 이 때문에 루비가 버클리음대 입시에서 부른 조니 미첼(Joni Mitchell)의 ‘이제 양쪽에서(Both Sides, Now)’라는 곡의 의미는 남다르게 다가올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이제야 인생을 양쪽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됐다.”는 가사의 한 구절은 그의 목소리를 빌려 내뱉은 우리 모두의 솔직한 마음일 거다. 1993년 모 의류업체의 TV-CF에서, 배우 한석규의 가슴 한구석을 비추며 “그의 자전거가 내 가슴 속으로 들어왔다.”라고 나지막이 속삭였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