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신동욱

필모그래피는 감독의 관심사가 어디서 어떻게 이동하는 중인지를 보여준다. 부산 지역에서 꾸준히 다큐멘터리를 연출 중인 신나리 감독 필모그래피는 단편 극영화 [그 자리](2015)로 시작한다. 영화는 좁은 골목 주택가에서 국제 결혼 전단지를 붙이는 남성과 그 뒤를 따르는 아이가 주인공이다. 대사 한 마디 없는 짧은 영화지만 이 작품은 신나리 감독의 필모그래피 전체를 관통하는 공통점까지는 아니더라도, 감독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몇 가지 단서들을 제공한다.
우선 감독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낮은 곳들이다. 극중 두 사람이 다니는 곳이 부산 남구 모처의 달동네처럼 보이고, 남성이 국제결혼 전단지를 붙이는 작업을 하고 있지만 꼭 그래서만은 아니다. 빵 하나를 나눠 먹고, 청테이프로 전단지 아래를 마저 붙이는가 하면 떨어진 아이 가방 끈을 붙이는 등 장면 연출을 통해 이 영화는 두 사람 사이에서 묘한 연대감을 연출한다. [천국 장의사](2015)와 [붉은 곡](2018), [녹](2018) 등 이어지는 영화 작업에서도 신나리 감독은 그 스스로 카메라 앞에 나서면서까지 소외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공감하려는 연대 의식을 강하게 보여준다.
자신이 사는 동네에 터를 두고 작업한다는 점 역시 신나리 감독 작품들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다. 부산 지리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그 자리] 엔딩 타이틀 올라가는 그 자리가 부산 남구에서도 오륙도와 가까운 백운포라는 점을 눈치챌 수 있다. [천국 장의사]의 공간 배경도 이 지역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제목 그대로인 장의사 간판이 지역 주민이던 감독의 호기심을 자극했을 것이라 짐작할 만하다.

‘우리 동네’에 호기심을 두고 관찰하며 카메라로 공간을 들여다보던 감독은 돌연 이 공간을 크게 벗어나 만든 영화를 세상에 내놓는다. 단편 다큐멘터리 [붉은 곡]과 장편 [녹]이다. 신나리 감독은 부산 기장 소재 탄광마을로 영화적 공간을 훌쩍 옮겨갔다. 일제가 조선인 노동력을 착취했던 곳이다. 이 과정에서 영화가 다루는 담론의 크기 역시 지극히 사적인 호기심에서 공적인 관심사로 확장됐기 때문에, 나는 이 영화 전과 후로 감독의 생각과 사상에 큰 변화가 있었을 것이라 짐작했다. 그러나 단지 감독이 남구에서 기장군으로 이사를 갔기 때문이라고 했다. 물론 한일 문제에 대한 비판적 인식 없이는 발굴이 불가능한 소재였겠지만, 신나리 감독은 그저 이사 간 동네에서 다시 흥미로운 영화 소재를 찾은 것이었다. 다큐멘터리 영화 감독에게 여러가지 자질이 필요하겠지만, 신나리 감독이 수년 간 다큐멘터리 영화 감독으로 활동하고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자신이 사는 동네를 들여다보려는 호기심과 관찰력이다.
특히 신나리 감독은 영화에 사용되는 사운드의 힘을 잘 알고 이를 필요한 장면에 제대로 쓸 줄도 알았다. 텍스트에 의존하면 부족한 연출력을 손쉽게 감춘 채 서사를 편리한대로 이끌 수 있다. 이를 바꿔 말하면, 대사를 완전히 배제한 설정은 연출력이 아직 무르익기 전인 영화 감독들에게는 무리한 시도일 수 있다. 그래서 이런 시도를 한 작품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감독 초기작에 대사가 통째로 생략된 경우는 보기 어렵다. 그럼에도 기왕에 결정했다면, 용기 있는 선택 뒤엔 대가가 따른다. 대사가 빈 자리는 이미지와 사운드가 더욱 끈끈하게 채워줘야 한다. 그렇지 않았다간 자칫 설명이 안 되는 영화가 될 수도 있다.
신나리 감독은 필모그래피 첫 작품인 [그 자리]에서 대사를 통째로 덜어냈다. 이렇게 만든 작품 중에 실패하지 않은 대표작은 지대한 배우가 주연을 맡았던 단편 극영화 [농어와 달](김효정, 2009)이다. 지대한 배우는 35분 영화 내도록 XXX, OOO 딱 여섯 글자 욕만 내뱉는다. 다른 대사는 없다. 참 지독한 컨셉이다. 그렇게 해도 [농어와 달]은 설득력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배우의 연기력과 공간 설정 등 연출력이 지독한 컨셉을 충분히 뒷받침하고도 남았기 때문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신나리 감독의 시도 역시 신인 감독의 패기 또는 자신감으로 읽힌다. 대사 빼도 설명할 수 있고, 대사 대신 다른 사운드로 얼마든지 대체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신나리 감독의 사운드 연출력은 특히 [녹]에서 돋보인다. 많은 요소들이 있지만, 이제는 관광지가 된 일본 광산으로 시퀀스를 넘길 때마다 나오는 ‘일본어로 녹음된 관광 가이드 목소리’는 부산 기장 광산 마을의 녹물 이미지와 극적으로 대비돼 청각적으로 큰 효과를 관객들에게 전달한다. “‘아시오 광산 체험관’이라니, 징용을 체험할 수도 있다는 말일까.” 이런 생각이 곧바로 들 수 있도록 하는 장치가 일본어 관광 가이드의 녹음된 육성이다. 탄광 열차 소리도 있다. 굴곡진 근현대사를 수평으로 펼쳐 흐름을 보여주는 장치로 신나리 감독은 시각적으로는 패닝을, 청각적으로는 탄광 열차 소리를 선택했다. 철커덩하면서 열차가 지나갈 때마다 관객들 가슴도 함께 철커덩 철커덩한다.
사는 곳 근처 광산마을 이야기에서 시작한 [붉은 곡]으로부터 확장해 나온 담론을 신나리 감독은 [녹]을 통해 더욱 키워 나갔다. 감독이 하나의 문제에 천착해 깊이를 더하는 건 다큐멘터리 영화 감독에게는 필수적이라 느껴질 만큼 흔한 일이다. 일제에 의해 파괴된 공동체를 다룬 영화는 많지만, 감독의 탐구 정신이 작품을 거듭하면서 계속해 확장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그런 점에서 [녹]은 신나리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좋아하고 추천하는 작품이다. 그의 첫번째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 [녹]에 작가로서의 역량이 잘 녹아 들어있다. 올해 DMZ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한국경쟁 본선에 진출한 [뼈](2022)는 말하자면 [붉은 곡]과 [녹]을 다시 한 번 더 이어 나가는 연장선이다. 철저히 개인이었던 다큐멘터리 감독이 커다란 역사 속으로, 그것도 어두컴컴한 광산 속을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는 모습이 머리 속으로 그려진다. 정말 궁금하다. [뼈]를 통해 신나리 감독은 얼마나 변화한 모습을 보여줄까.

신나리 감독 인터뷰를 칼럼에 싣기 위해 [붉은 곡]부터 감독과 함께 작업해 온 PD에게 연락했다. 신 감독 연락처를 줄 수 있겠냐는 질문에 PD는 어렵게 “어렵겠다”고 전했다. 사실은 신나리 감독이 몹쓸 병에 걸려 고통스럽고 긴 투병 생활을 이어가는 중이라며, PD 본인도 요새는 신나리 감독과 통화하기가 무척 어렵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투병 소식을 전해 들어 이미 알고 있었다고 마음이 덜 아픈 것은 아니었다.
부산 지역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인들은 몇 달 전부터 개인 SNS와 협회 홈페이지 등을 통해 신나리 감독을 응원하는 모금 운동을 진행중이다. 그가 거리낌 없이 카메라 앞에 나서는 연출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한 번도 신나리 감독을 보지 못한 채 이 칼럼을 쓸 뻔했다. [천국 장의사] 영화로 신나리 감독을 처음 뵀으니 하는 말이다. 신나리 감독이 하루 빨리 건강을 회복하길 바라는 마음을 이 글에 옮긴다. 아픈 신나리 감독 대신 PD가 예비 관객들에게 전한 이야기를 지면에 전한다.
[뼈]는 햇수로 4년에 걸쳐 제작한 작품입니다. 일본 촬영 마지막 회차에 현지에 있던 대형 크루즈에서 코로나가 발생해 확산했는데, 이 작품 마지막 제작 단계에 신나리 감독까지 안타까운 병에 걸렸습니다. 함께 작업한 PD로써 마음이 많이 아픕니다. 일본 곳곳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게 일제 강제 징용의 흔적들이 남아 있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우리가 관심을 두지 않으면 역사적 사실은 은폐되고, 잊힐 수도 있습니다. 이름 없이 사라져간 강제 징용자의 영혼을 이 영화를 통해 달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작품에 주인공으로 출연해주신 80대 노인 두 분께도 한없는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