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신동욱

몸과 정신은 연결되어 있다. 몸이 아프면 곧 따라 정신도 힘들고, 마음이 아프면 머지않아 몸 어딘가 고장 난다. 삶이 무엇이냐고 흔히 묻고 그에 따라 각각이 내리는 정의도 모두 다르다. 이 질문에 명확한 해답을 내놓을 사람은 없지만, 육체와 정신 사이에서 건강한 균형을 잡아 나가는 과정 사이에 삶의 본질이 있음은 분명하다. 다큐멘터리 영화 [자화상]은 이 관계를 심도 있게 표현한다. 건강이 많이 나빠졌지만, 예술의 의미로 대변되는 정신의 건강을 치열하게 담아내어 많은 여운을 남긴다. 이 작품의 구성과 메시지를 리뷰를 통해 풀어본다.

2022 EBS 국제다큐영화제(EIDF)에 초청돼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선공개된 다큐멘터리 영화 [자화상 Self Portrait]은 거식증에 걸린 한 사람의 인생와 예술 혼을 섬세하게 담은 작품이다. 주인공 레네 마리 포센(Lene Marie Fossen)의 몸과 마음이 거의 동시에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건강한 균형을 잃은 상태에서 시작한다. 신경성 식욕부진증, 흔히 말하는 거식증이 그가 앓는 병이다. 영화에 따르면 그는 “느리게 자살하는 것과 같은 삶”을 살았다. 음식을 먹지 못하니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것과 다름없다는 뜻이다. 거식증 진단을 받은 10살 이후 그는 입원을 비롯해 끔찍한 투병 생활을 이어갔다.
그 속에서도 레네는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자화상’이라고 부르는 일련의 작품들은 그가 작업한 사진이다. 그는 자신의 앙상한 몸과 마음을 사진을 통해 내보이면서 생생한 고통의 순간을 감상자에게 전달한다. 이는 곧 그 스스로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예술로 승화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영화 [자화상]은 그래서 레네라는 거식증 환자의 투병기, 그리고 삶이 예술이 되는 순간을 포착하는 사진작가 레네를 두 축 삼아 이야기를 전개한다.
‘자화상’에서 아쉬웠던 부분

영화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하기 전에 두 문단만 할애해 [자화상]을 보면서 아쉬웠던 부분을 나름 이야기하려고 한다. 당연히 [자화상]은 단점보다 장점이 많은 영화다. 그래도 [자화상]에서 도드라지는 단점 이야기를 하지 않고서, 영화의 좋은 점만 소개하기엔 조금 낯간지럽다. 영화는 레네의 일대기에서 발생한 결정적인 장면을 촬영하지 못하고 두 번이나 자막에 의존한다. 편집 단계에서 뺀 것과, 촬영 자체를 하지 못한 것은 다르다. [자화상]은 후자 쪽이다. 영화의 힘은 이미지다. 자막은 이미지를 보완할 목적으로 최소한으로만 사용하는 게 좋다. 자막에만 의존해 이야기를 전개하기는 너무 간단하고 손쉽다.
백 번 양보해 감독에게도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으리라 짐작한다. 그래도 영화를 쉽게 만들려고 한 흔적을 들키면 관객이 별로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 아무래도 감독이 피사체에 충분히 다가가지 않은 것 같다. 다큐멘터리 영화가 가지는 아주 중요한 매력을 놓쳤다는 아쉬움이 크다. 그런 점에서 감독의 카메라는, 당장 영화의 주인공이자 촬영대상인 레네의 카메라와 직접 비교되기도 한다. 레네는 촬영 대상에게 필요한 만큼 다가가 그로부터 예술을 끌어낸다. 반면 감독의 카메라는 레네를 관찰한 시간은 길었으나, 양적으로 충분히 레네를 관찰하지 못했다. 내 지적에 얼마나 동의할지 궁금하다. ‘다큐멘터리 다움’이란 어떤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을 보면서 다양한 관점으로 이야기할 자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적어본다.
삶은 언제 예술이 되는가

창작가는 누구나 자신의 작품을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구가 있다. 그러나 인정받는 작품을 만든다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더욱 예술의 경지에 오른다는 건 아주 소수에게만 허락된 재능이다. 예술을 아주 오랫동안 공부한 사람에게도 그 경지에 도달하기란 요원하고 어려운 일이다. 하물며 정신과 몸이 동시에 성치 않은 레네에게 예술의 경지란 상상하기 쉬운 수준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레네가 스스로를 촬영한, 아주 특별한 ‘자화상’들은 감상자로부터 특정한 감정을 끌어내는 데 성공하며 예술성을 인정받았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 일이었을까?
다큐멘터리 영화 [자화상]은 이에 대한 명쾌한 해답까지는 아니더라도 중요한 실마리를 기록해 보여주는 작품이다. 소녀 시절 시간을 붙잡아 두고 싶었던 레네는 사진 작업에 빠진다. 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찍으며, 자신 역시 카메라 앞에 나선다. 그러나 레네가 찍는 사진은 ‘바디 프로필’이 아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아름다운 쪽으로 끌린다. 흔히 말하는 육체미와는 거리가 있는 거식증 환자의 몸이 누가 시켜서도 아닌데, 병에 걸린 채 카메라 앞에 피사체로 선다는 생각은 일반적이지 않다.
영화에 따르면 레네 역시 카메라 앞에 서기까지 어려운 시간들을 보냈다. 고통으로 번뇌하는 시간을 보내며 레네는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포용했다. 흉하든 아름답든, 수치스럽든 자랑스럽든. 자신을 스스로 받아들이고 나자 곧 드러냄도 자연스러워졌고, 그렇게 그는 자신의 삶이 예술이 되도록 만들었다. 나는 영화에서든 현실에서든 이 경지를 목격하면 ‘내려놓음의 경지’라고 부른다. 무엇이 되고 싶다는 욕심을 부리며 스스로 고통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번민하는 스스로를 수용함으로써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여기가 바로 삶이 예술이 되는 최초의 순간이다.
그래서 레네의 작품엔 꾸밈이 없고,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고통과 욕구를 감상자들에게 숨김없이 보여준다. 레네가 이 경지에 도달하면서 얻은 것은 예술성 뿐만 아니다. 레네는 사진을 찍으면서부터 하고 싶은 작업이 많아졌고, 곧 살고 싶은 본능적 욕구도 강해졌다고 고백했다. 작품과 삶이 긍정적인 쪽으로 상호 작용을 일으켰다. 이게 꼭 거식증 환자였던 레네에게만 해당하는 일은 아닐 것이다.
많은 EIDF 초청작 중에서도 [자화상]을 추천하는 데엔 거식증 환자에 대한 왜곡된 사실을 바로잡기 위해서보다 중요한 이유가 있다. 레네와 달리, 우리 시대는 예술을 추구하면서도 삶은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 같다. 삶을 욕구에 가둔 채, 자신을 위하기보다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몸을 만들어 자랑하는 일을 멋이라고 포장하는 사회는 어쩐지 조금 공허하다. 내려놓음의 경지가 필요해 보이는 사회일수록, 진짜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고 포용할 진정한 [자화상]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