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슬기
※스포일러 주의~ 본문에는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 [로건], [블랙 위도우]의 결말이 공개되었습니다
대중들이 생각하는 히어로물은 악당을 물리치고 히어로가 속한 사회의 평화를 되찾는 아름다운 과정을 흥미롭게 그린 것이다. 그래서인지 히어로물을 사랑하는 팬들이라면 “히어로물은 유치하다.”라는 선입견을 한 번씩은 마주했을 것이다. 여기 그런 선입견을 마주했을 때, 자신 있게 추천할 영화 3편이 있다. 영웅들의 고생은 눈물 없이(?) 보기 힘들며, 그렇게 지켜낸 정의 역시 위태롭다. 그럼에도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바치는 희생정신을 발휘한다. 그저 재미로만 보기에는 그들의 모습에 미안함과 ‘리스펙트’를 느낀다. 히어로 무비의 전형적인 틀을 깨고 장중한 주제를 담아낸 마블 작품들을 살펴보자.
캡틴 아메리카 : 윈터 솔져
정의로운 리더가 맞닥뜨린 무거운 현실

[캡틴 아메리카 : 윈터 솔져]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윈터 솔져에게 습격을 당한 스티브(캡틴 아메리카)가 동료들과 함께 쉴드를 둘러싼 거대한 음모를 밝히고 정의를 바로잡으려는 고군분투를 담은 작품이다. 그 과정에서 자신과 첨예하게 대립하는 윈터 솔져가 지난 2차 대전에서 실종된 자신의 하나뿐인 친구, 버키 반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정의의 편에 서서 자신과 뜻을 함께 하던 버키는 악의 무리인 하이드라에게 세뇌 당한 후였으며, 그들의 꼭두각시로 악행을 저지르고 있는 상황에 스티브는 고통스러운 고뇌에 빠진다. 죽은 줄 알았던 친구와 재회했다는 기쁨보다 그가 정체성을 잃고 악인이 되었다는 현실이 스티브를 짓누르며 심적 고통은 더욱 가중된다.

시작은 같았지만 결국 다른 길로 걷는 스티브와 버키의 상황은 보는 이에게 복합적인 감정이 들게 하며, 단순하게 그들이 선인인지 악인인지 판단을 내리기 어렵게 한다. 그것은 선과 악의 절대적인 가치를 판단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는 의미를 뜻한다. 이렇게 영화는 현시대에서 영웅과 정의의 의미가 무엇인지 끊임없는 화두를 던지며 단순한 히어로물과는 다른 매력을 선보인다.
탄탄한 스토리와 예측불허의 전개로 철학적인 주제를 드러내며, 동시에 수준 높은 액션을 담아내 히어로물의 재미를 더한다. 맨몸 액션이 선사하는 극강의 쾌감을 경험할 수 있으며, 닉 퓨리, 블랙 위도우 등 자신의 본능에 충실한 입체적인 캐릭터들의 등장이 극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또한, 스티브가 많은 히어로를 제치고 ‘캡틴’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심도 있게 담아내, 마블 작품 중 손꼽히는 웰메이드 작품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로건
한계에 직면한 영웅을 떠나보내는 과정

[로건]은 영생을 살아가던 돌연변이 로건(울버린)이 치유와 전투 능력을 서서히 잃어가며 병든 프로세서 X와 숨어살던 중, 자신의 유전자로 탄생한 돌연변이 소녀 로라를 만나 마지막 불꽃을 태우는 이야기를 그렸다. 로건은 X맨 시리즈로 첫 등장하며 15년 넘게 대중들의 곁을 지킨 돌연변이 히어로로, 이 영화는 그의 인생 가장 마지막 페이지를 담았다. 로건이 사는 가까운 미래에는 돌연변이들을 혐오하며 그들이 능력을 잃게 하기 위해 갖은 술수를 쓰는 인간들이 한편으로는 돌연변이들의 능력을 탐내 그들의 유전자로 어린 돌연변이를 만들어냈다. 로건은 어린 돌연변이들을 지켜내기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지고, 그들에게 해방과 자유를 쥐여준 후 영원히 잠에 든다.

이 영화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악당을 물리치던 화려하고 멋진 로건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없다. 늙고 병든 행색으로 나타난 그의 모습은 남들과 다르게 특별해 보이는 히어로도 결국에는 똑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로건이 살던 사회에서 돌연변이는 인간에게 위협적인 존재라 여겨지며 배척당하지만, 그들은 한낱 소수자, 약자에 불과했다.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했지만, 가장 인간다운 끝을 맞는 그의 모습이 역설적인 의미를 내포한다.
자신의 dna에서 파생된 어린 소녀 로라를 보며 그는 자신의 과거를 떠올렸을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든 로라와 어린 돌연변이들을 자신보다 나은 환경에 데려다 놓기 위해 처절한 싸움을 펼친다. 남아있는 자신의 모든 능력을 쥐어짜서 그들을 지키는 로건의 모습은 안쓰럽고 애처롭다. 지난 과오를 씻고 더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해 끝을 향해 달려가는 늙고 병든 히어로의 모습은 슬프지만 차근차근 그를 떠나보낼 수 있는 준비를 하게 한다. 이 영화는 한계란 없을 것 같은 히어로의 먹먹한 벽 혹은 애환에 대해 생각하게 하며, 그가 겪고 있던 고통에서 벗어나 해방되는 엄숙하지만 아름다운 과정을 경험할 수 있는 작품이다. 다른 히어로물과 확연히 다른, 영웅서사의 끝을 향해 치닫는 전개와 결말이 먹먹한 여운과 감동을 선사한다.
블랙 위도우
연대가 갖는 의미와 힘

어벤져스의 전사, 나타샤(블랙 위도우)의 첫 솔로 무비로, 그가 자신의 어두운 과거와 연결된 레드룸에 맞서 진실을 밝히고 배후의 거대한 음모를 깨부수려는 사투를 그렸다. 레드룸에서 보냈던 나타샤의 어린 시절 서사부터, 당시 임무를 위해 위장 가족의 연을 맺었던 옐레나, 멜리나, 알렉세이와의 재회까지 팀업 무비에서 볼 수 없었던 나타샤의 새로운 이야기를 담았다.
레드룸은 어린 소녀들을 강제로 인간 병기로 키우고, 그들의 삶을 통째로 빼앗아 조종하며 잔인한 짓도 서슴지 않는다. 그런 레드룸에 인생을 송두리째 저당잡혀 암살, 저격 등 온갖 범죄를 저질렀던 나타샤는 자신의 손으로 직접 무너뜨린 줄 알았던 레드룸이 아직도 굳건하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는다. 그는 자신의 어두운 과거와 같은 전철을 밟고 있을 레드룸의 암살자들을 위해 싸움을 시작한다.

[블랙 위도우]를 관통하는 가장 큰 주제는 연대다. 나타샤가 자신의 복수를 위해서가 아닌, 다른 동료들을 구하기 위해 펼치는 사투는 단순한 여성 서사를 넘어서 여성 연대라는 대의를 드러낸다.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다른 여성들에게 손을 뻗어 각성시키며 진정한 히어로로 거듭난다. 이는 타인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우리 사회에 중요한 메시지를 던지는 행위이며, 연대가 가진 의미와 힘에 대해 재고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현실적인 문제를 빗대어 진정성 있게 풀어낸 작품으로, 깊은 공감과 울림을 선사하며 [블랙 위도우]는 멋진 마무리를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