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신동욱
공부를 너무 좋아하는 바람(?)에 전교 100등권 안에 절대 이름이 날 리 없었던(?) 필자는 나와 함께 공부에 관심이 없던 몇몇 친구들을 모아 고등학생 한때 비보이에 전념했던 적이 있다. 그때 우리 사이에서 센세이션이었던 영상들을 기억한다. 당시 영상들 속에서는 팝핀현준이 모자를 뒤집어 쓴 채 Ice T의 음악 ‘Reckless’이 눈에 보일 것처럼 춤을 추고, 익스프레션 크루가 이른바 ‘마리오네뜨’ 라는 퍼포먼스로 비보이 초보자들을 당황하게 했다.
지금은 레전드로 손꼽히는 비보이 홍텐과 피직스는 JSA를 배경으로 비보이 배틀을 연출하기도 했다. 전주 출신 비보이 크루 라스트 포 원이 세계 대회에서 우승한 뒤 국악과 힙합을 퓨전한 파헬벨의 ‘캐논 변주곡’ 위에 보여준 비보이 퍼포먼스는 희망이었다. 영상만 보면 비보이도 잘만 하면 광고도 찍고 유명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들은 수업이 끝난 교실에 남아 책상을 뒤로 쫙 밀고는 영상 속 비보이들을 따라하기에 바빴다. 팀을 만들고 공연 음악을 준비하며 쿨 모 디 Kool Moe Dee, 제임스 브라운 James Brown과 같은 이름을 자연스럽게 알게 됐다.

올해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개막작으로 [킵 스텝핑 Keep Stepping](루크 코니시, 2022)이 선정됐다. 호주 최대 규모 스트리트 댄스 페스티벌인 ‘Destructive Steps’ 조직위원회 이야기와 이 페스티벌에 참가한 댄서들의 경쟁 이야기가 두 축으로 전개된다는 소개를 보면 벌써 가슴이 뛴다. 이번 DMZ다큐영화제의 개막작 선정은 시대의 유행과 흐름이 반영된 결과라고도 본다. 몇 년 전부터 매년 가을엔 꾸준히 래퍼 서바이벌 프로그램 ‘쇼 미 더 머니’가 방영돼 인기를 끌고, 힙합 장르가 음원 차트 1위에 오르며 화제성을 독차지하는 일도 이젠 제법 흔하다.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던 한국 비보이는 JTBC 프로그램 ‘쇼 다운’으로 주목 받으며 이제 올림픽을 준비하고 있다. 언더 그라운드였던 힙합 문화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늘어났다. 한 눈에 보기에 힙합은 소위 ‘주류’ 까지는 아니더라도 ‘대세’ 정도는 된 것 같다. 그런데 한편 불안하다. 예전에도 비슷한 현상이 있었기 때문이다.
매스컴이 빠진 자리

힙합 다큐멘터리 영화 [플래닛 비보이 Planet B-Boy](감독 벤슨 리)가 제작된 2007년까지 한국 비보이는 한참이나 세계대회를 휩쓸고 있었다. 배틀 오브 더 이어나 UK B-BOY 챔피언십, 레드불 비씨 싸이퍼 같이 세계에서 손꼽히는 대회 결승 무대에는 거의 한국 비보이가 올랐다. 여세를 몰아 국내에서도 대회가 개최됐다. LG 비보이 챔피언십, R-16 같은 대회다. 특히 R-16은 한때 세계 5대 대회로도 평가받으며 한국 비보이 상승세와 함께 힙합 팬들에게 큰 인기를 누렸다. 그 무렵 KBS 스포츠 채널에서는 ‘SOUL CITY’라는 프로그램을 편성해 힙합 문화를 조명했다. 지금은 보기 힘든 MC GO, DJ DUST, 각나그네가 방송에 출연했다. LG 비보이 챔피언십은 방송사에서 따로 중계를 할 정도였다. [플래닛 비보이]도 국내 비보이가 인기를 끌던 시점으로 개봉 시기를 잡아 관객들을 만났다.
하지만 순풍은 거기까지였다. 역풍이 불기 시작했다. 매스컴은 그들이 보여주는 쇼와 배틀에만 집중해 돈을 벌었다. 비보이를 힙합 문화로 접근하려는 시각 자체가 부재했다. 비보이에 접근하는 직간접적인 경로가 다양하기는커녕 둘도 없이 오직 쇼 비즈니스 뿐이었으니 비보이 문화는 점점 사람들로부터 흥미를 잃었다. 사람들이 떠난 바로 그 자리에서 카메라는 철수했다. 대회는 사라졌고, 비보이만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았다.
[플래닛 비보이]의 한계

[플래닛 비보이]는 비보이를 조명한 작품으로 개봉 전 영화 팬들과 힙합 팬 양쪽으로부터 기대를 받았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 본 [플래닛 비보이]은 양쪽 모두로부터 거의 즉각적인 외면을 받았다. 영화가 담고 있는 내용과 형식이 모두 비보이로부터 카메라를 철수하기 직전의 매스컴 수준이었다. 미국과 일본, 프랑스와 한국 등 각국 비보이 크루 중에서 ‘배틀 오브 더 이어 Battle of the Year’에 참가한 비보이들 이야기를 담았지만 그들이 겪는 경제적이고 현실적인 어려움과 대회에서 이룬 성취에만 전적으로 초점을 맞추는 바람에 정작 힙합이 무엇인지, 그들이 왜 힙합에 열광하는지, 힙합은 음악인지, 춤인지, 삶인지 문화인지에 대해 아무것도 대답해주지 못했다. 그 바람에 비보이는 ‘무대에서 춤추는 사람’에 그쳤고, 입체적인 조명은 이번에도 실패했다.
비보이들이 겪는 어려움과 그 속에서 겪는 성취가 중요하지 않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어려움과 성취에만 주목하느라 힙합 문화 그 자체에 피상적으로 접근하는 바람에 비보이를 다양한 각도에서 보여줄 수 있는 좋은 기회들을 너무 많이 흘려 보냈다. 그래서 제대로 된 힙합 본질에 접근한 비보이 다큐멘터리 영화가 무엇이었냐고 물어보면 여태까지도 [The Freshest Kids: A History of the B-BOY](감독 이스라엘, 2002) 한 편 뿐이다. 비보이들의 대체적인 평가다. 비보이 열풍에 숟가락 잠시 얹은 작품으로 [플래닛 비보이]는 영화 팬들로부터도 빠르게 잊혀졌다. [킵 스텝핑]을 기다리는 속마음이 복잡한 건 이 때문이다.
For Real

힙합과 다큐멘터리 영화는 완전히 다른 예술 영역이지만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두 영역 모두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엄격하게 따진다. 남의 동작이나 가사를 어설프게 따라해 자기 것인 양 보여주는 비보이들을 진짜들은 바로 알아본다. 힙합에서 자주 말하는 ‘real recognize real’이다. 진짜는 진짜를 알아본다는 뜻이다. 다큐멘터리에서도 마찬가지다. 모르면서 아는 척, 충분히 촬영 대상에게 다가간 척하는 것을 알 만한 사람은 모두 다 알아본다. 이제 다큐멘터리 영화 팬이든 힙합 팬이든 옛날 같지 않다. 가짜는 보자 마자 알아챈다. 그래서 [킵 스텝핑]만큼은 ‘진짜’였으면 좋겠다. 어설프게 비보이 문화에 접근했다가는 [플래닛 비보이]처럼 양쪽 모두로부터 외면받을 수도 있다. 또 이번에야말로 힙합이 한철 유행처럼 지나지 않기를 바란다. 즐기는 관객 입장에서야 힙합이 비즈니스일 뿐일 수도 있지만, 그 속에는 진짜 삶 그 자체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으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