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신동욱

27회 부산국제영화제 포스터

여느 해처럼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도 기대할 만한 다큐멘터리 영화들이 대거 초청받았다. 그런데 유독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초청작에 전쟁 관련 다큐멘터리 영화가 눈에 많이 띄는 것이 불안하다. 지구가 아직 전쟁의 위협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양이다. 전쟁을 겪지 못한 세대가 누리는 평화가 잠시일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엄습한다. 내전, 혁명, 그리고 전쟁. 초청작 대부분을 관통하는 키워드들이다. 1년을 다시 기다린 영화제 개막을 앞두고 들떴던 마음이 조금 우울하다. 다큐멘터리 영화는 삶에 매몰됐던 스스로 잠시 고개를 들어 우리가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지를 객관화해 볼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일단 내 할 일은 해야 한다(?) 다큐멘터리 쇼케이스 부문 초청작들의 시놉시스와 예고편 모두를 살펴 부산국제영화제 초청작 일부를 소개하고 추천하는 일이다. 사실 영화를 보지 않고 영화를 추천하는 일은 늘 부담스럽다. 그럼에도 이때가 아니면 어디서도 다시 보기 힘들 작품들 중 시의성과 감독의 필모그래피, 시놉시스, 예고편 등을 복합적으로 고려해 지면이 허락하는 데까지 소개해보려고 한다. 주력 세 편은 [레트로그레이드 Retrograde](매튜 하이네만, 2022)와 [물꽃의 전설 Legend of the Waterflowers](고희영, 2022), [사랑의 불꽃 Fire of Love](사라 도사, 2022)이다. 박 터지는 온라인 예매 오픈을 지나 한숨 돌리는 지금까지 매진되지 않은 작품들이 여기 숨어있다. 칼럼 후딱 보고 예매 서두르는 사람이 티켓 임자다.

1. 매튜 하이네만의 신작 ‘레트로그레이드 Retrogra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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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튜 하이네만 감독은 코로나19로 사투를 벌이는 병원을 다뤘던 전작 [더 퍼스트 웨이브 The First Wave](2021)로 제26회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받은 적이 있는 감독이다. 이 감독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손쉽게 구해볼 수 있는 작품은 [프라이빗 워 A Private War](2018)와 [카르텔 랜드 Cartel Land](2015). [레트로그레이드]와 크게 봤을 때 전쟁과 국가, 정부라는 큰 키워드들이 닿아 있는 작품들이다. 전쟁의 이면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다큐멘터리 감독들은 너무 많고, 각각이 전쟁을 다루는 방식도 다양하다. 하이네만 역시 그만의 방식으로 전쟁을 다루는 감독 중 한 명이다. 우선 [프라이빗 워]는 하이네만 감독이 전하고 싶은 시리아 내전의 참상과 저널리스트의 책무, 그들의 인간적인 고뇌까지를 명징하게 보여준다. [프라이빗 워]는 하이네만의 필모그래피에서 보기 드문 극영화이지만,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동시에 저널리스트이기도 한 하이네만 스스로 어떤 다큐멘터리 감독이고 싶은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극영화 [프라이빗 워]를 보고 다큐멘터리 영화 [카르텔 랜드]까지에 이르면, [프라이빗 워]의 주인공이자 실존 인물인 열혈 기자 마리 콜빈에 하이네만이 얼마나 이입할 수 있었는지를 짐작할 만하다. [카르텔 랜드] 속 카메라는 미국-멕시코 국경을 뛰어다니는 하이네만이 소총 대신 든 무기나 다름없다. [프라이빗 워]와 [카르텔 랜드]까지 미리 구해볼 정도로 열정이 있는 시네필이라면 신작 [레트로그레이드]를 전작들과 비교해보는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으로 본다.

2. 제주도의 ‘물꽃’과 프랑스의 ‘불꽃’

성질이 서로 다른 두 개의 꽃도 눈에 띈다. [물꽃의 전설 Legend of the Waterflowers](고희영, 2022)과 [사랑의 불꽃 Fire of Love](사라 도사, 2022)이다. 우선 [물꽃의 전설]은 ‘자연’ ‘영상미’ ‘평온’ 같은 키워드와 어울리는 작품이다. 대사 한 마디까지 생략한 예고편만으로 감독이 이 영화에서 보여주려는 모두를 파악할 수는 없지만 왠지 제주로 떠나고 싶어지고, 무심결에 지나친 제주 풍경 모두 사실은 누군가에겐 삶 그 자체였다 여기게끔 만드는 작품일 것이라고 기대할 만하다. 물질 경력이 87년인 96세 할머니가 주인공이다. 과연 전설이라 할 만하다.

[사랑의 불꽃]은 예고편만으로 이미 압도적이다. 다큐멘터리에 썩 어울리는 말이 아니지만 예고편이 블록버스터 영화의 CG가 아닌가 싶을 정도다. 화산재가 카메라 앞에 툭툭 떨어지는데 제아무리 성능 좋아도 은색 방호복일 뿐인 옷을 입은 사람이 그 앞을 지나쳐 폭발하는 분화구를 향해 걷는다. 심지어 촬영 대상이 카메라 쪽으로 인사를 건네는 장면으로 보아, 촬영하는 사람과 찍히고 있는 사람은 영화제 프로그램 노트에서 언급한 프랑스인 부부로 보인다. 사랑하는 사람이 용암 쪽으로 가는 모습을 촬영하는 다큐 정신이 놀랍다. 총탄 쏟아지는 전쟁터 한복판에는 ‘종군기자는 군인이 아니니 건드리지 말라’는 희미한 불문율이라도 있지만 자연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도대체 어떤 배짱으로 폭발하는 화산을 촬영했을까.

부산국제영화제 역시 프로그램 노트를 통해 “근접 영상은 어떻게 촬영했는지 모를 정도로 생동감이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선댄스영화제에서 ‘올해 최고의 다큐멘터리 중 하나가 될 것’이라는 찬사까지 받았다고 한다. 기대가 크다.

이 밖에 볼만한 부산국제영화제 다큐멘터리는?

이미지: 부산국제영화제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는 이 외에도 눈길을 끄는 작품들이 많다. [두 사람 Life Unrehearsed](반박지은, 2022)은 동성 커플 이야기를 그리지만 섹슈얼보다 휴머니즘 쪽에 가깝다. 동성애를 바라보는 부정적 시각이 우리 사회에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어쩔 수 없이 인정할 수밖에 없다면, 동성애에 거부감이 강한 사람들이 다른 작품들보다는 경계를 낮추고 다가설 만한 작품이다. 이렇게 조금씩이라도 굳건히 장벽을 친 편견을 허물고 싶다.

이미지: 부산국제영화제

[우리가 지켜보는 동안 While We Watched](비나이 슈클라, 2022)은 감독 전작도 구해보기가 어렵고 예고편도 없어 프로그램 노트만으로 어떤 영화일지 짐작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지만, 그럼에도 분명히 놓쳐서 후회할 것만 같은 인상을 준다. 2년 동안 매일 8시간씩 인도 저널리스트인 라비쉬 쿠마르를 따라다니며 영화를 촬영했다 하니 촬영 분량만 해도 엄청날 텐데, 그 영상들을 편집해 속도감 넘치는 작품을 만들었다고 한다. 영화를 찍어봤거나 찍는 사람을 가까이서 지켜본 적이 있는 사람은 이 작업 얼마나 지난한지 알고 있다.

이미지: Takju Corp

[유령의 해 Eternal Brightness](오민욱, 2022)는 이른바 ‘보도연맹 사태’를 다뤘던 조갑상의 소설을 원작으로 극영화도 아닌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었다 하여 호기심을 끄는 영화다. 다큐멘터리 주인공은 극영화와 달라 감독의 지시를 선명하게 따르지 않는다. 그런데 [유령의 해] 주인공은 소설 [밤의 눈]에서 발췌한 지시문들을 어떻게 따를 수 있었을까. 자칫 다큐멘터리 문법을 중대하게 위반한 작품일까 싶지만 예고편과 시놉시스를 보면 영화 [유령의 해]가 소설 『밤의 눈』을 영화에 인용한 방식을 짐작할 만하다. 내레이션이 소설 문장을 포함하고, 주인공이 소설 속 공간을 거니는 연출 방식이다. 서사에 익숙한 관객들에게는 조금 낯선 영화일 것으로 예상하지만, 색다른 다큐멘터리 영화로 통찰력을 기르고 싶은 예비 관객이라면 [유령의 해]를 권해보고 싶다.

이미지: studio June

‘한국인 민간인 폭격에 관한 미군 보고서’를 영화로 옮긴 작품도 있다. 예고편에는 강렬한 영화 사운드에 맞춰 익숙한 도시들이 예시로 제시된다. 질리게 보고도 도무지 기시감이라는 게 들지 않는 전쟁 다큐멘터리 영화 중에서도 특히 [초토화작전 Scorched Earth](이미영, 2022)은 아직도 6.25 전쟁에 관해 못다 한 말이 남았다고 호소하는 작품이다. 끔찍할 것이 불 보듯 뻔하면서도 꼭 마주해야 할 것만 같은 영화가 [초토화작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