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동기
영화를 우리 삶에 빗대어 표현할 때면 과연 어떤 연관성을 갖느냐에 관한 질문이 심심찮게 들려온다. 그럴 때마다 개인적으로 영화가 우리 사람들을 주제로 이야기를 꺼내기 때문이라고 답하곤 한다. 영화는 장르를 구분하지 않고 사람들을 직시하고 그 삶을 들여다보며 다양한 메시지를 던진다. 이를 위해 연출자는 다양한 연출 방법, 시각적 혹은 청각적 요소를 가진 여러 장치를 이용하기도 하고, 여기에 자신의 메시지를 구색을 갖춰 알맞게 담아내기도 한다. 이야기를 만들어 낸 이는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을 것이고, 연출자는 이를 어떤 방향으로 색칠하고 어떤 수식어를 사용해 표현할지를 함께 고민하는 거다. 이 과정에서 영화는 꽤 재밌는 담론의 여지를 생성하게 된다.
사람들은 영화를 보며 여러 요소에 대해 갑론을박을 논한다. ‘맞다 틀리다.’, ‘옳다 그르다.’, 혹은 ‘재미있다 재미없다.’까지도 함께 말이다. 마치 영화의 숙명처럼 느껴질 정도다. 영화가 이렇게 논쟁의 중심에 놓여있다면, 한 번쯤 ‘왜 그럴까.’에 대한 궁금증도 더해질 수 있겠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영화가 삶을 닮아가는 모양새를 취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 SF나 공포물처럼 현실과 거리가 먼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게 인간의 상상을 통해 창조됐음을 고려한다면 사람들의 공감대를 쉽게 얻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일 거다. 이 점이 바로 영화가 쏟아내는 여러 이야기가 우리 삶에 직간접적으로 미치는 그 ‘이유’의 개념을 아주 제대로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삶을 논하는 ‘이유’를 고민하자면 문득 떠오르는 한 작품이 있다. 마틴 브레스트 감독의 1993년 작, 여인의 향기는 삶의 무거운 질문에 대한 친절한 해답을 제시하는 작품이 아닐 수 없다. 왜 굳이 제목을 ‘여인의 향기’라고 지었을까. 퇴역 장교 슬레이드(알 파치노 분)는 여성에 대한 집착을 제법 보이는 인물이다. 영화 속에서 이 집착은 다양한 감각으로 표현되곤 하는데, 이는 촉각을 이용한 가벼운 터치가 될 수도 있고, 때로는 시각적 청각적인 부분을 넘어서는 진한 후각의 그것을 자극하기도 한다. 그는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이지만, 태어났을 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다. 멀쩡한 눈을 갖고 평소 자신의 주장을 쉽게 굽히지 않던 강직한 성품의 인물이, 우연한 사고로 인해 자신의 시력을 잃어버린 거다.
다시 말해, 그는 자신이 갖고 있던 걸 잃어버렸고, 이는 즉 과거를 끌어낼 수 있는 유일한 게 바로 여성이 풍기는 ‘향기’라는 얘기와도 같다. 이렇게 놓고 보면 이는 새로운 것과는 좀 다르다. 처음 만나는 여성일지라도 후각을 통해 얻는 향기로 인해 자신의 잃어버린 과거를 되찾을 수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이처럼 영화는 그를 항상 과거에 빠져 살아가는 인물로 묘사한다. 화려했던 과거를 지녔지만, 지금은 그걸 가질 수 없기에 그는 자신의 미래도 희망이 없다는 생각으로 삶을 마무리하고자 시도한다. 영화의 제목이 뜻하는 의미는 바로 ‘향수(Nostalgia)’이다. 그 그리움을 끄집어내기 위한 인물로 바로 찰리(크리스 오도넬 분)가 등장한다.
영화의 한 장면을 돌이켜보자. 슬레이드가 호텔에서 총을 이용해 자살을 시도할 때 찰리는 이를 사전에 파악하고 그를 저지하려 나선다. 이때 슬레이드는 찰리를 향해 총을 겨누며 지금 도망가지 않으면 그를 쏘고 자신도 죽겠다고 경고한다. 찰리는 끝까지 그를 포기하지 않으며 자신도 어차피 미래가 보이지 않으니 그와 함께 죽겠다고 맞서는데, 이 긴장된 한 장면은 영화 속에서 단순히 상황이 제시하는 교훈을 안겨주는 포인트를 넘어서고 있다. 다시 말해, ‘총’이라는 기제를 이용해 찰리의 내면 변화를 간접적으로 안내해주고 있는 듯하다. 총은 방아쇠를 당기면 즉사할 수 있는데, 사느냐 죽느냐가 극명하게 나뉘는 이 상황이 찰리에게 주어진 복잡한 사건과 연결되어 그의 심리를 날카롭게 꿰뚫고 있다는 얘기다. 그야말로 두 사람의 캐릭터가 명확하게 그 개성을 뽐내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찰리는 학교에서 우연한 사고를 목격하면서 자칫 퇴학당할 위기에 빠진다. 그러면서도 친구를 믿으며 이를 의지하고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심적 고통에 허우적대는 인물이다. 반면 슬레이드는 행동의 결단이 분명하다. 삶의 끝자락에 서 있는 그의 내면은 이미 윤리적인 부분을 넘어섰다. 살아온 과거가 자신을 거울에 비추듯 찰리에게도 그를 죽이고 자신도 죽을 수 있다고 서슴없이 얘기한다. 이 상반된 두 캐릭터를 한데 모은 건 이 영화의 장점이다. 두 사람이 섞여 서로 맞지 않는 성격과 행동들이 어떤 방향으로 ‘합(合)’을 맞춰가느냐의 과정이 영화의 주된 내러티브를 만들어낸다는 얘기이다.

여기에 바로 ‘탱고’와 ‘페라리’가 등장한다. 스텝에 대한 사설은 나중으로 차치하더라도, 두 기제는 나름의 의미를 가진다. 호텔에서 우연히 마주친 ‘도나’라는 이름의 아가씨. 탱고를 좋아하고 배우고 싶었으나 남자친구로 인해 탱고를 배우지 못했다는 그 아가씨에게 슬레이드는 자신이 가르쳐줄 테니 우선 함께 시도해보자고 제안한다. 결국 두 사람은 무대로 나가게 되고, 아무도 춤추지 않는 그곳에서 두 사람은 아름답고 화려한 음악에 맞춰 훌륭한 무대를 만들어낸다. 수많은 이들이 두 사람의 무대를 쳐다보지만, 시력을 잃은 슬레이드는 남들의 시선을 전혀 신경쓰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춤을 춘다. 여기서 찰리가 얘기한 그가 살아야 할 ‘이유’ 하나가 등장한다. 그가 바로 ‘탱고’를 잘 춘다는 사실 말이다.
두 번째 기제는 이탈리아를 빛내는 명품 스포츠카 ‘페라리’이다. 그렇게나 몰고 싶었던 스포츠카였지만 앞이 보이지 않아 시도조차 하지 못했던 페라리를 슬레이드는 달콤한 유희로 대여하고 만다. 여기에 찰리가 그에게 운전대를 내어준 것도 재밌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페라리가 어떻게 되든지, 죽음의 기운도 두려워하지 않은 채 슬레이드는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차를 이끌기 때문이다. 이게 그가 살아야 할 두 번째 이유로 나서는 건 전혀 이상하지 않다. 페라리를 그 누구보다 아주 멋지게 운전할 줄 안다는 바로 그 사실 말이다. 물론 이 두 가지 기제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면서, 그는 여전히 자신의 미래에 대한 회의에 다시 사로잡히고 말지만, 그런데도 이 두 가지 기제는 그에게 아주 묘하고 특별한 기운을 선사한다.

앞에서 영화는 항상 논쟁의 중심에서 서성이고 있다고 얘기한 바 있다. 여기서 논쟁은 대상과 행동, 사건의 방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포인트다. 자신의 삶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이끄는 힘이자 자격이라는 논리다. 이는 모두가 가지고 있고 모두가 해낼 수 있다. 우리는 누구나 삶을 두려워한다. 가진 것도 없고 배운 것도 없고 능력도 없고, 살면서 부딪히는 것도 많다. 슬레이드가 도나에게 건넨 그 말 한마디, “스텝이 엉키는 걸 두려워하지 마세요. 스텝이 엉키면 그게 바로 탱고니까요.”가 아주 뜨겁게 다가오는 이유다. 살면서 실패와 좌절에 부딪히는 것, 그 자체도 인생이고 그 자체가 삶을 만든다. 어떤 삶을 살아가든 간에 내가 만드는 삶, 그 자체가 중요하다는 얘기다.
이처럼 영화는 우리가 살아가야 할 이유를 찾는 과정을 계속해서 강조하는 모습이다. 우리 삶은 언제나 살아가야 할 이유를 ‘성공’에서 찾고 있다. 마치 만들다 만 것을 미완성으로 단정 지으며 부정적인 시선으로 얘기하는 것처럼. 실패한 것도 인생이고 만들다 만 것도 인생이다. 높고 낮고 크고 작은 비교의 중심에서, 그 어떤 것으로도 삶을 비교하는 건 불가능하다. 거기에 어떤 자격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환경에서도 우린 하나의 삶으로서 살아야 할 이유가 있고, 이를 찾아가는 게 바로 우리 삶이다. 영화는 계속해서 얘기한다. 영화는 여전히 논쟁의 중심에 서 있고, 여기에는 옳고 그름이 아닌 삶 그 자체만이 존재한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