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신동욱

이미지: 소울필름

부산은 영화의 도시를 오랫동안 표방해왔다. 부산시가 내건 캐치 프라이즈에 속아(?) 많은 학생들이 부산 소재 관련학과로 진학했지만, 정작 수년 전까지만 해도 부산에 영화 산업은 전무하다시피 했다. 지금은 사정이 조금 나아졌다고 하지만, 관련 공공기관이 부산으로 내려와 센텀시티에 자리 잡았다고 없던 산업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산업은 돈을 벌어야 한다. 공공기관은 반대로 돈을 쓰는 곳이다. 영화를 만들려면 서울로 가야 하지 않느냐는 말을 들을 때마다 부산 영화학도들은 계속 작아졌다.

자존심이 상한 영화학도들에게 부산국제영화제는 빛 받은 여름바다처럼 눈부셨고, 눈 내린 겨울 산처럼 단단한 존재였다. 부산에서 왜 영화 공부를 하느냐는 핀잔과 조롱을 들을 때마다 부산국제영화제를 방어 논리로 내세워 자존심을 지킬 수 있었다. 그러던 부산국제영화제는 [다이빙 벨](이상호, 2014)이 개봉하던 해에 정치적으로 탄압 받으며 큰 위기를 겪었다. 부산시는 그마저 하나 남은 부산 영화의 자존심에 압력을 가하면서도 시정 홍보 영상엔 꼬박꼬박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 장면을 넣었다. 부산시가 참 뻔뻔해 보였고 많이 미웠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영화제 지키기에 나섰다. 돌아가신 김지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도 그 중 한 사람이다. 순수하게 영화와 영화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부산국제영화제를 만들어 원년 멤버로 활동한 김지석 프로그래머에게 견디기 어려운 상황이 지속됐다. 밖으로는 영화제에 지속적으로 가해지는 압력을 견뎌야 했고, 안에서는 내분 속에서 발생한 갈등을 봉합해야 했다. 그 지난한 세월을 겪으며 마음의 병을 얻은 김지석 프로그래머는 2017년 출장 차 방문한 프랑스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김지석 프로그래머와 가까운 인연이 아니지만, 부산 영화학도 중 하나인 나도 그에게 마음의 빚이 있다. 그가 만들고 가꾼 영화의 바다 덕분에 몇 자 칼럼이나마 쓸 수 있게 됐음은 물론이다. 새삼 그를 만나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다. 그러나 이젠 보고 싶다고 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부산국제영화제를 만든 그를 향한 애도와 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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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추모하는 뜻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지석]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됐다. 이 영화를 연출한 김영조 감독은 부산에서 영화를 공부했고,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일했고, 이미 두 차례 감독으로도 영화제에 초청받은 경력이 있다.

그가 기억하는 김지석 프로그래머는 영화제 땐 늘 바쁘셨고 인자한 미소가 인상적인 사람이었다. 김영조 감독은 “대단한 선생님이자 영화 선배”라고 그를 평가하며 “영화를 만들면서 김지석 프로그래머의 다른 모습들을 알아갈 수 있었다”고 말했다. 김영조 감독은 김지석 프로그래머와 사적인 인연이 없다. 영화 [지석]이 사적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김지석 프로그래머로부터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작품으로 만들어진 이유이기도 하다. 김영조 감독은 이 점이 영화를 만들 때 가장 힘들었던 부분 중 하나였다고 고백했다. 김지석 다큐멘터리 연출 섭외를 받았을 때 본인 스스로 적임자가 아니라고 생각했고, 사적인 관계가 없다 보니 영화를 선뜻 맡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김영조 감독을 움직이게 한 것은 역시 마음의 빚이었다. 감사 인사를 전하지 못한 채 김지석 프로그래머가 하늘의 별이 됐다는 부채 의식이 [지석]의 시작이었다. 다만 김지석 프로그래머를 잘 알거나 함께 공유하는 에피소드가 없다 보니 객관적인 거리를 두고 스토리를 그릴 수밖에 없었는데, 김 감독은 “지금이라면 더 가까이 갈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예전에는 제가 모셔야 하는 분이었다. 감히 다가가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지석을 그리워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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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석]에는 김영조 감독 말고도 김지석 프로그래머를 애도하고 그리워하는 많은 아시아 영화인들이 출연한다. 근작으로는 [마르게와 엄마](2019)와 [어느 독재자](2017)를 연출한 모흐센 마흐말바프, 또 [브로커](2022)와 [어느 가족](2018)으로 국내 영화 팬들에게도 익숙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등 세계 영화계에서도 손꼽히는 거장은 물론 PD, 영화배우들이 출연해 그를 회상한다. 특히 두 감독은 ‘리멤버링 김지석’이라는 책을 통해 김지석 프로그래머에게 보내는 편지를 쓴 적이 있다. 그래서 영화 속 인터뷰는 크게 두 갈래로 설명할 수 있다.

하나는 김지석 프로그래머를 잘 아는 이들의 구술 회고다. 여기에는 외국 영화제에서 김지석 프로그래머를 만난 젊은 감독들로부터 영화제 위기 당시 그가 어떤 고뇌를 갖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는 내용들이 포함된다. 다른 하나는 세상을 떠난 김지석 프로그래머에게 띄우는 편지다. 이 부분에서 감독은 인물들이 김지석 프로그래머를 생각하는 마음을 단지 읽어 내려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영상으로 시각화해 보여준다. 특정 인물의 사후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들은 대개 푸티지와 인터뷰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측면이 있어 영상 구성이 단조롭고 내레이션이나 자막 등 텍스트 의존도가 높은 경우가 많다. 그 점에서 [지석]은 한국 다큐멘터리 영화가 오랫동안 지속해 온 전형적인 휴먼 다큐멘터리 영화 양식과도 일정한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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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빙 벨] 상영은 부산국제영화제에 대한 정부의 탄압으로 이어졌고 영화 속에서도 큰 갈등을 유발하는 사건이지만 [지석]은 마냥 무겁고 우울하게만 끝나지 않는다. 영화는 김지석 프로그래머를 통해 영화제를 둘러싼 내외부의 갈등을 들여다보고, 그를 추모하고 애도하는 한편으로 관객들이 가진 꿈을 스스로 생각해보도록 한다. 김지석 프로그래머는 생전 가족, 친구와 함께 영화를 보면서 커피 한 잔 마실 수 있는 영화관을 달과 바다가 보이는 곳에 짓고 싶었다. 그가 부산국제영화제를 일군 점을 생각해보면 소탈한 꿈이다. 김영조 감독은 “관객들이 영화를 보고 마냥 마음 무겁기보다는, 김지석 프로그래머를 통해 위로를 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며 [시민 케인](오슨 웰스, 1941) 속 ‘로즈버드’를 인용했다. ‘로즈버드’는 삶에서 가장 순수했던 시절을 소환하게 하는 영화 속 장치이다. [지석]은 특히 마지막 장면을 통해 김지석의 ‘로즈버드’인 월령극장을 통해 관객들이 이루고 싶은 본인만의 순수한 꿈을 생각하도록 유도한다.

[지석]을 보고 영화관을 나섰다. 매표소에 줄 선 영화 팬들, 영화의전당을 가득 채운 인파가 새삼스럽다. [지석]은 차라리 세상에 나오지 말았어야 할 다큐멘터리 영화는 아닐까. 다른 곳도 아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영화제 창립 멤버인 김지석 프로그래머를 추모하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상영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김영조 감독에게 메일을 보냈다. 그에게 [지석]을 통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관객들을 만나 소감을 물었다. 얼마 뒤 김영조 감독으로부터 온 카톡에 녹음 파일로 전송된 음성을 여기에 풀어 쓴다.

2018년에 기획해 2년의 제작 기간을 거쳤지만
코로나 팬데믹으로 묵혀두었던 [지석]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하게 돼 기쁩니다.

[지석]이 김지석 프로그래머를 기억하는 세계의
또 다른 영화제에서 초청받아
많이 상영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국내에서도 영화 팬이 아니라면
김지석 선생님을 잘 모르는데,
많은 분들이 영화를 보고
김지석 프로그래머를 기억해줬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