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혜연
[에브리씽 에브리워에어 올 앳 원스]로 왕년의 홍콩 대표 액션 스타 양자경이 MZ 세대를 사로잡았다. 필자 역시 양자경과 초면이기에 필모그래피를 자세히 훑어봐야 했는데, 아직 공개되지 않은 개봉 예정작들이 줄을 서 있었다. 마법 학교를 배경으로 하는 넷플릭스 시리즈 [선과 악의 학교], 13년 만에 후속작을 내놓는 [아바타: 물의 길], 7번째 트랜스포머 시리즈 [트랜스포머: 라이즈 오브 더 비스트] 등 장르도 다양하다. 그야말로 양자경은 ‘왕년’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여전히 ‘열일’ 중이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로 뜻밖의 영웅이 된 양자경. 모르긴 몰라도, 그는 멀티버스 속 수많은 양자경 중 최고의 양자경을 살고 있는 것 같다. 홍콩부터 할리우드까지 에브레웨어[?]에서 활약중인 그의 화끈하고 강렬한 연기가 돋보이는 작품들을 살펴보자.
예스 마담 (1985) / 마담 역

범죄 사건을 해결하는 형사들의 사투를 그린 [예스 마담] 시리즈는 양자경이 본격적으로 인기를 누리기 시작한 작품이다. 1985년 초기작부터 양자경이 주연을 맡은 작품은 4편이다. 몸을 사리지 않는 과감한 액션 연기가 특징이며, [예스 마담] 시리즈를 통해 국내에서도 상당한 팬층을 보유하게 되었다. 양자경은 어린 시절 발레리나를 꿈꿨던 만큼 유연함이 돋보이는 움직임들을 소화한다. 타고난 운동 신경에 꾸준한 노력으로 다져진 무술 실력이 더해졌으니 훌륭한 액션 스타가 탄생할 수 있었고, [예스 마담] 시리즈는 흥행에 성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작품의 성공을 발판으로 그의 필모그래피는 더 넓은 곳에서 다시 시작된다.
007 네버 다이 (1997) / 웨이 린 역

첩보 영화 [007] 시리즈의 18번째 작품인 [007 네버 다이]. 중국 정부의 스파이이자 대령인 웨이 린은 제임스 본드와 협력해 공동의 적을 쫓으며, 교활한 악당의 음모를 추격하고 파헤친다. 양자경이 연기한 웨이 린은 분명 새로운 타입의 본드걸이었다. 제임스 본드 옆 미녀로만 소비되던 본드걸이 최초로 주체성을 갖게 되었고, 제임스 본드 못지않은 액션 연기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동양인 본드걸이 되었던 양자경은 이 작품으로 할리우드 진출을 하게 된다. 홍콩에서 누려볼 수 없는 할리우드 촬영 현장의 배려가 인상적이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와호장룡 (2000) / 수련 역

청조 말엽, 선대부터 전해내려오는 청명검을 둘러싼 무사들의 음모와 갈등, 배신을 그린 무협 영화 [와호장룡]. 양자경이 연기한 무사 수련은 운명의 굴레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게 되는 여인이다. 이안 감독의 섬세하고 우아한 연출, 화려한 영상미와 더불어 양자경과 장쯔이의 액션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숨을 멎게 하는 두 배우의 공중 무술 장면은 여전히 상징적인 장면으로 회자된다. 북미권에서의 흥행 기록은 여전히 깨지지 않고 있으며 미술, 음악, 촬영 등 다양한 부문에서도 수상을 기록했다. 인간을 내밀하게 탐색했다는 점에서 장르 영화를 넘어선 감동을 주었고, 전 세계에 동양 무술의 우아함과 깊은 철학까지 전달했다는 점에서 기념비적 작품이다.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 (2018) / 엘레노어 영 역

아시아를 주름잡는 재력가의 아들 닉과 연애 중인 중국계 미국인 레이첼이 상류 사회 속에서 혼란을 겪는 이야기를 그린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 양자경은 닉의 고상하고 위엄 있는 어머니이자 가족과 전통을 중시하는 예비 시어머니 엘레노어 영 역할을 맡았다. 자유로운 성격의 예비 며느리 레이첼에게 적대적인 시선을 보내는 엘레노어 영은 본인 역시 고된 시집살이를 경험한 인물이다. 빈부 격차와 고부갈등, 출생의 비밀까지 한국 드라마에서 자주 소비되던 소재들에 인종 문제가 더해진 작품으로, 미묘하지만 치열한 상류층들의 신경전을 목격할 수 있다.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 (2021) / 잉난 역

암살자의 삶을 거부하고 평범한 삶을 택한 샹치가 신비한 힘을 일깨우게 되는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 마블 코믹스의 중국계 슈퍼히어로이자 쿵후의 대가로 불리는 ‘샹치’를 주인공으로 하는 첫 번째 실사 영화이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2]에 이어 두 번째 마블 출연 작품으로, 양자경은 최초로 마블 시네마틱 세계관에서 1인 2역을 맡은 배우가 되었다. 여기서부터 그만의 멀티버스가 시작되었나 보다. 어쨌든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에서는 샹치의 어머니이자 탈로의 실질적인 지도자인 잉난 역할을 맡았다. 성장 중인 아들에게 오랜 역사와 비밀을 전해주기도 하고, 탈로의 무술을 전수하기도 하고, 진정으로 싸워야 할 때를 알려주기도 하며, 온갖 선과 악이 모두 너라는 가르침을 주기도 한다. 너그럽지만 단호하고 카리스마 있는 모습이 슈퍼히어로의 어머니임을 수긍하게 한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2022) / 에블린 왕 역

미국에서 힘겹게 세탁소를 운영하는 이민자 에블린이 무수한 멀티버스 속을 살아가는 자신에게서 그 모든 능력을 빌려와, 위기의 세상과 가족을 구해내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마블 스튜디오에서 포텐을 터트렸던 루소 형제 제작, 다소 기괴한 뮤직비디오를 제작하던 다니엘스 연출, 미국 독립영화계의 신흥 강자로 떠오른 배급사 A24의 합작이다. 개성과 실험성으로 무장했다는 이야기다. 양자경에게는 할리우드 첫 주연 작품이며 대표작 경신은 물론, 2023년 오스카 여우주연상 유력 후보로 점쳐지고 있다.
그가 연기한 에블린은 더 나은 미래를 꿈꾸는 평범한 이민자이며, 가족들의 말썽 때문에 골치를 앓는 어머니이고, 세상을 구해야 하는 운명에 처한 뜻밖의 영웅이다. 멀티버스가 아니더라도 이미 벅찬 역할들을 수행하고 있는데, 세상은 그에게 이보다 중대한 사안이 있다고 말한다. 지금 이곳의 너는 최악의 인생이며, 이 삶은 단지 통로에 불과하다는 말로 현재를 의심하게 만든다. 마치 이 삶이 쓸모없는 나머지 삶이라는 듯이. 하지만 영화는 마지막에서야 그 모든 가능성에 흔들리지 않아도 괜찮다는 진심을 전한다. 모든 나쁜 것이 소멸하는 베이글을 눈앞에 두고도 도망치지 않는 우리들에게, 다른 어디에서 어떤 무엇이든 될 수 있음에도 내 옆을 지켜주는 어머니에게 바치는 찬사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