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혜연
오랜 시간 감초 역할로 사랑받아온 배우 이성민은 최근 인터뷰에서, 다시 태어나면 배우를 하지 않겠다는 말을 남겼다. 다양한 직업, 다양한 일, 다양한 모험을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그는 연기밖에 모르는 배우였다. 그리고 2022년, 그의 꼿꼿함이 마침내 빛을 본 듯하다. 화제작이었던 JTBC 금토일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에서 인생 캐릭터 ‘진양철’을 만났기 때문이다.
주연으로 거듭났던 [골든타임] 속 진중하고 대담한 의사 최인혁, 많은 사회 초년생들에게 위로를 전했던 [미생] 속 오상식 과장, 재벌가의 민낯을 보여준 [재벌집 막내아들] 속 진양철 회장까지. 그가 연기한 캐릭터들은 지금도 어딘가에 살아 있을 것만 같다. 특히 [재벌집 막내아들] 속에서 이성민이 보여준 연기는 연일 화제의 중심이었다. 실제 나이에 비해 상당한 고령의 캐릭터를 연기했음에도 위화감 없는 연기를 펼치며, 매회 레전드 연기를 갱신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생생하고 꾸준한 연기로 대중들에게 감탄을 안겨준 그의 또 다른 출연작 중 영화 중심으로 살펴보자.
방황하는 칼날(2014) / 장억관 역

살인자가 된 아버지와 그를 잡아야만 하는 형사의 숨 막히는 추격전을 그린 범죄 스릴러 영화 [방황하는 칼날]은 추리 소설 대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원작을 바탕으로 제작된 작품이다. 이성민은 살인사건의 담당 형사 장억관 역할을 맡아, 여중생을 죽인 18세 소년들과 그 소년을 죽인 여중생의 아버지 사이에서 진실을 파헤친다. 어린 악마들의 잔혹한 살인과 어른의 사적 복수를 중심으로,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섞인 부당한 현실을 날카롭고 서늘한 시선으로 응시한다. 특히 복수를 하는 가해자를 심정적으로 공감하지만 법을 집행하는 자로서 어쩌지 못하는 현실의 한계에 안타까워 하는 모습을 섬세하게 보여준다. 이성민은 천의 얼굴 정재영과 뜨거운 연기 앙상블을 펼쳤으며, 깊은 내공을 가진 두 배우의 폭발적인 연기 대결을 감상할 수 있다.
바람 바람 바람(2018) / 이석근 역

끝도 없이 사랑받고 싶은 철부지 어른들의 ‘바람’을 그린 코미디 영화 [바람 바람 바람]. [스물], [극한직업] 등을 연출한 이병헌 감독의 작품으로, 체코 영화 [희망에 빠진 남자들]들을 리메이크했다. 이성민은 20년 경력을 자랑하는 바람 계의 전설 이석근 역할을 맡아, 능청스럽고 미워할 수 없는 마성의 매력을 지닌 캐릭터를 탄생시켰다. 매 작품마다 엄근진을 선사했던 그에게 좀처럼 만나기 힘든 코믹 연기라 더욱 반가웠다. 4번의 작품을 함께했던 신하균과는 유쾌한 매제 케미를, 탁월한 생활 연기를 보여주는 송지효와는 뜨거운 남매 케미를 뽐냈다. 사랑을 하고 결혼도 했지만 여전히 외로운 어른들의 이야기를 통해, 무료한 일상 속에서 일탈을 꿈꾸는 이들에게 생기를 불어넣는다.
공작(2018) / 리명운 역

적으로 대립하고, 민족으로 공존하는 남과 북의 역동적 앙상블을 그린 첩보 영화 [공작].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 [수리남] 등을 연출한 윤종빈 감독의 작품으로, 국내외로 호평을 받으며 한국형 첩보영화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이성민은 북한의 최고위층 인물 리명운 역할을 맡아, 흑금성(황정민)과의 미묘하고 치열한 관계를 형성한다. 그의 정갈하고 고급스러운 정장, 진한 눈썹과 올백 머리는 북한 고위층의 강인함을 상징한다. 철저한 고증으로 1990년대 황량한 시대적 분위기를 살렸고, 쉽게 접할 수 없었던 북한의 모습까지 그의 연기로 리얼하게 담아냈다. 이 작품에서 열연으로 대종상, 부일영화상, 백상예술대상 연기상을 휩쓸었다.
미스터 주: 사라진 VIP(2020) / 주태주 역

도심 한복판을 배경으로, 사라진 VIP를 찾기 위한 인간과 동물들의 역대급 팀플레이를 그린 코미디 영화 [미스터 주: 사라진 VIP]. 이성민이 연기한 주태주는 VIP를 잃어버린 국가정보원 에이스 요원으로, 갑작스러운 사고 이후 동물과의 대화 능력이 생기게 되는 인물이다. 이성민과 완벽한 호흡을 맞춘 군견 알리를 비롯해 호랑이, 고릴라, 앵무새, 흑염소, 판다 등 각양각색 동물들이 등장해 색다른 즐거움을 선사한다. ‘동물과의 대화’라는 소재는 아이들의 흥미를 끌었고, 동물들과 배우들의 케미는 순도 높은 웃음을 선사했다. 무게감을 덜어낸 이성민의 새로운 도전으로 무해한 가족영화를 탄생시켰다.
남산의 부장들(2020) / 박통 역

1979년, 대한민국 대통령 암살사건이 벌어지기 전 40일간의 이야기를 그린 정치 스릴러 [남산의 부장들]. [내부자들], [마약왕]을 연출한 우민호 감독의 ‘욕망 3부작’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작품이다. 막중한 권력을 휘두른 중앙정보부에 대해 모든 매체가 보도를 꺼렸던 시대, 2년 동안 ‘남산의 부장들’ 기사를 연재했던 김충식 기자의 논픽션 베스트셀러를 원작으로 한다. 그 중심에서 18년간 제1권력자로서 독재 정치를 행했던 박통 역할을 이성민이 맡았으며, 부와 권력에 대한 끝없는 욕심과 정권의 끝자락에서 느꼈을 불안한 심리를 세밀하게 재현했다. 막걸리를 마시며 홀로 노래를 읊조리는 장면은 많은 스태프와 배우들이 명장면으로 꼽기도 했다.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주요 사건이자, 18년간 지속된 독재 정권의 종말을 알린 10.26 사건을 더 정확하고, 적나라하게 들여다볼 수 있다.
기적(2021) / 정태윤 역

마을에 간이역 하나 생기는 게 유일한 인생 목표인 동네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기적]. 이성민이 연기한 원칙주의 기관사 태윤은 오로지 기차역을 짓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준경(박정민)의 아버지 역할이다. 그는 깊은 눈빛과 현실감 넘치는 연기로 소화해 내며 모두의 아버지를 떠오르게 한다. 영화는 푸른 하늘 아래 싱그러운 녹음, 드넓은 산자락을 통과하는 철로 등 자연과 어우러진 생동감 넘치는 풍경을 담아내며 1980년대의 감성을 따스하게 녹여냈다. 또한 빨간 공중전화기와 우체통 등 디테일한 연출을 보여주며, 그 시절을 함께한 관객들에게 기분 좋은 향수를 선물한다. 박정민, 이성민, 임윤아, 이수경의 신선한 조합으로 웃음과 설렘, 감동을 만들어낸 소박하고 뜨거운 가족영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