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숙 작가와 배우 송혜교가 합을 맞춘 ‘복수극’이라, 언뜻 상상이 가질 않았다. ‘로맨스 장인’으로 정평이 난 두 사람이 과연 어떤 작품을 만들어낼까 기대와 동시에 걱정도 됐다. 하지만 넷플릭스 [더 글로리]가 치밀하게 짜인 서늘한 복수극이란 걸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문동은의 삶은 하루하루가 지옥이다. 박연진 무리에게 매일같이 끔찍한 괴롭힘을 당하지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줄 친구나 어른이 주위에 단 한 명도 없다. 동은은 자신이 죽어야만 이 고통이 끝날까 싶어 건물 위로 올라갔다가 이내 마음을 다잡는다. 앞으로 동은의 인생 목표이자 꿈은 자신을 지독하게 괴롭혀온 ‘박연진’이다.
동은과 달리 연진의 인생은 어려울 것도, 두려울 것도 없는 놀이터였다. 자신의 곁을 지키는 친구들이 있었고, 돈과 인맥이면 자신이 저지른 끔찍한 만행들이 깔끔하게 없던 일이 됐다. 시간이 흘러 기상캐스터가 된 연진은 바라던 대로 가장 젊고 예쁠 시기에 재평건설 대표 하도영을 만나 결혼을 하고 예쁜 딸까지 가졌다. 정말 남부러울 것이 없는 삶이었다. 학창 시절 하찮은 ‘장난감’에 불과했던 동은이 나타나기 전까진 말이다.
드라마는 10년이 넘도록 복수를 준비해온 동은, 그리고 그와 다시 한번 얽히며 파멸로 치닫는 이들의 이야기다. ‘분노’, ‘잔혹함’, ‘과도함’ 등 복수극이라 하면 으레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하지만 동은은 우리가 흔히 아는 복수극 속 주인공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고, 복수를 준비하는 과정도 낯설다. 차갑고 무덤덤하며, 메말랐다. 그렇다 보니 극이 처진다는 느낌이 들 법도 한데, [더 글로리]는 이러한 톤을 유지하면서도 시청자들을 몰입하게 만드는 요소들이 곳곳에 깔려있다.
우선 배우들, 그중에서도 송혜교의 낯섦이 특히 인상적이다. 여러 작품을 통해 우리에게 익숙한 ‘사랑스러운’ 송혜교가 아닌, 지금껏 보지 못한 서늘하고 웃음기 없는 얼굴은 놀라우리만치 신선하고 매력적이다. 첫 악역으로 송혜교와 더불어 연기 변신에 나선 임지연 역시 이런 면모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표독스럽고 악랄한 박연진 역을 완벽히 소화해낸다. 동은과 연진의 유년시절을 연기한 정지소와 신예은의 새로운 발견도 반갑다.
가해자들에게 어떠한 서사를 주지 않은 점도 돋보인다. 박연진과 전재준(박성훈), 이사라(김히어라), 최혜정(차주영), 손명오(김건우) 모두 순전히 자신들의 즐거움을 위해 동은의 삶을 짓밟은 인물들이다. 어디 동은 뿐이랴. 동은 이전에는 윤소희가 있었고, 이후 새로운 피해자가 된 김경란은 성인이 될 때까지 연진 무리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끔찍한 악행을 저지르면서 반성의 기미조차 없는 이들이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동정할 여지는 없을 거라는 점이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킨다.
소재가 소재인지라 이전 작품들에 비해 덜하긴 해도 김은숙 작가만의 대사와 유머감각은 여전하다. 캐릭터들 대사 하나하나가 인상적이지만, 특히 여성 캐릭터들 사이에서 펼쳐지는 맛깔난 대사들을 음미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동은의 조력자인 강현남(염혜란)과의 만담은 무거운 분위기를 환기시켜주고, 반대로 연진과는 작가 특유의 낯간지러운 대화가 이어지고 있음에도 살벌함이 느껴진다. 매력적인 배우와 스토리, 대사, 여기에 안길호 감독이 빚어낸 영상미의 조합이 [더 글로리]의 완성도와 재미를 높이는 주요한 요인이다.

다만 현재까지 공개된 에피소드들만 봐서는 동은과 주여정(이도현)의 관계에 대한 설득력은 다소 부족하다. 동은을 위해 칼춤도 불사하겠다는 여정의 순애는 단순히 비슷한 상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설득시키기엔 무리가 있고 몰입감도 깨진다. 아무래도 파트 1이 동은이 복수를 계획하는 것에 초점을 두다 보니 여정의 분량이 적을 수밖에 없는데, 문제는 두 사람이 만나는 순간마다 극의 장르가 복수 스릴러에서 로맨스물로 바뀐다는 것도 의문스럽다. 오히려 동은과 하도영(정성일) 사이의 미묘한 로맨스 기류가 더 흥미진진하게 느껴질 정도다. 물론 이후 공개될 파트 2에서 여정이 본격적으로 조력자로 나서는 만큼 그의 이야기 비중이 높아질 테니 아쉬움을 만회할 여지가 충분하다.
폭력의 묘사 또한 아쉽다. 동은의 복수에 설득력을 불어넣고 시청자들의 분노를 이끌어내기 위해서 그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왔는지에 대한 묘사가 어느 정도는 필요한 것은 맞다. 하지만 극중 학대와 폭력의 묘사는 지나치게 적나라하고 자극적이라 시청에 유의가 필요하다.
[더 글로리] 파트 2에선 동은이 인생을 바쳐서 준비한 복수가 본격적으로 실행될 예정이다. 연진의 과거를 마주한 도영은 과연 누구의 편에 설 것이며, 동은이 짜놓은 판 위에서 놀아난 연진 무리가 어떻게 동은의 앞을 가로막을까. 그리고 기나긴 복수의 끝에 무엇이 남을까? 파트 2가 공개될 3월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