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혜연

제주도에는 국내 최대 미디어아트 전시관이 있다. 현대 문화 기술을 자랑하듯 대형 스크린에 바다와 폭포, 풀과 불꽃을 수놓은 곳이다. 불이 꺼진 후에는 차가운 컨테이너 건물에 불과하겠지만, 불이 켜지면 언뜻 바다보다 더욱 바다 같은 광경이 펼쳐진다. 사방이 자연 경관으로 둘러싸인 제주 땅에서 굳이 그곳을 방문했었고, 견고하지 못한 모조품을 감상하는 순간 왠지 편안했다. 내 시각이 가공된 것들에 익숙해져 버린 탓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자연이 주는 경외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에 긴장감을 내려놓았던 것 같다. 실제로 그것은 진짜 물처럼 밀려오지만, 진짜 바다와 달리 나를 해치지 않았다. 이토록 나약하고, 그래서 친근하고, 망가져도 큰 아쉬움 없겠다는 것은 모든 가짜들의 힘이다. 그런 모습을 섬세하게 다룬 영화가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요시다 다이하치 감독의 영화 [종이 달]이다.

‘종이 달’은?

이미지: (주)영화사 오원 , (주)퍼스트런

[양의 나무] [키리시마가 동아리활동 그만둔대] 등 평범한 일상에서 특별한 이야기를 공감 있게 그려내는 요시다 다이하치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고, 일본의 대표배우 미야자와 리에가 주인공 리카 역을 맡았다. 평범한 주부 리카가 은행의 계약직 사원이 된 뒤, 고객들의 돈에 손을 대기 시작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가짜들의 세상을 옹호한다?

요시다 다이하치 감독의 영화 [종이 달]은 가짜들의 세상을 옹호한다. 가짜 사랑, 가짜 구원, 가짜 인생 속에도 진실한 쾌락은 존재하기 때문이다. 과거 일본에서 유행했던 ‘종이 달’처럼 말이다. 필름 카메라가 나오기 시작했을 무렵, 사진관에 모인 사람들은 초승달 모양의 가짜 달 아래에서 사진을 찍으며 한때의 가장 행복한 추억을 남겼다고 한다. 당연히 가족, 연인 등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였을 테다. 한낱 종이로 만든 가짜 달이라도, 우리가 진짜라고 믿고 약속한다면 그것은 곧 진짜 달이 되니까.

모두가 사라지지 않는 달을 보며 영원하고 따뜻한 순간을 나눌 때, [종이 달]의 주인공 리카(미야자와 리에)는 스스로 그 달을 지워버리는 인물이다. 동시에 10억 원을 횡령한 비범한 여자이기도 하다. 일본에서 실제로 일어난 은행 공금 횡령 사건을 바탕으로 제작된 이 영화는 ‘평범했던 주부의 일탈과 타락’으로 요약된다. 범죄극와 치정극을 표방하며, 다양한 인간들의 복잡한 욕망과 본성을 묘사한다.

영화의 배경은 버블 경제의 호황이 가라앉은 1990년대 일본이다. 새로운 유토피아인 줄 알았던 일본이 무너졌고, 사람들은 돈이 곧 거품일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돈에 관한 모든 환상이 걷힌 시대에서 누군가는 더 착실하겠노라 다짐하고, 누군가는 이 거품을 한껏 음미하겠노라 결심한다. 그러다가 서로의 욕망에 전염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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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롭지만 조금은 지루한 일상을 살고 있던 주부이자 은행의 계약직 사원 리카는 고객의 돈을 횡령하고, 그 돈을 이용해 젊은 남자와 달콤한 일상을 누리며 그의 빚까지 대신 갚아준다. 리카는 어린 시절, 타지의 어려운 아이를 후원하기 위해 아빠의 지갑에서 돈을 훔친 적도 있었다. 그 과정에서 돈의 출처는 중요치 않았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기쁘다’라는 수녀님의 가르침으로 면죄부를 얻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리카는 돈에 대해 경외를 느끼지 않게 되었고, 후에는 돈이 그저 종잇장에 불과하다는 생각까지 갖게 된다.

리카의 범행을 가장 먼저 눈치챈 직장 선배 스미(고바야시 사토미)는 단조로운 원칙주의자이다. 원치 않는 발령에도 군말 없이 순응하고, 밤 한 번 새우는 일을 자신에게 주어진 가장 큰 자유라고 여긴다. 이렇듯 일탈과는 거리가 멀기에, 리카의 위험한 행동을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범행 동기를 묻기도 한다. 스미가 알고 있는 ‘최선의 삶’이란, ‘가야 할 곳’으로 묵묵히 향하는 삶이다.

영화 속 인물들은 모두 조금씩 부자연스럽다. 처음으로 고객의 지폐를 빼내던 리카의 손과 일그러진 소녀 시절 선행이 그러했고, 커다란 집에 홀로 남겨진 젊은 애인이 그러했으며, 기쁨의 의미를 일러주는 수녀 또한 그러했다. 무엇보다, 욕망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스미의 얼굴은 가장 그러했다. ‘당신이 갈 수 있는 곳은 여기까지다’라고 말하는 스미는 창을 깨면서까지 나아가는 리카를 평생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가짜 세상에서 진짜를 원했던 트루먼 쇼
진짜 세상에서 가짜로 행복했던 종이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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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스러운 인물은 뜻밖의 장소에서 등장한다. 창을 깨고 도망친 리카는 태국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과거 자신이 후원했던 아이가 어른이 된 모습을 목격한다. 그는 시장에서 딸과 함께 과일을 팔고 있었고, 리카에게 웃으며 과일을 건네기까지 한다. 너무도 생생하고, 누구보다 ‘진짜’ 같은 그 앞에서 돈을 종잇장으로 여기던 리카는 처음으로 흔들린다. 외면했던 현실의 잔해와 마주하게 된 것이다. 아마 리카는 앞으로 더 자주 당혹스러울 것이고, 뒤늦은 후회를 할 수도 있겠고, 평생 지금처럼 도망치듯 세상을 부유할 것이다. 하지만 종이 달처럼 나풀거리는 삶의 가벼움을 깨달은 이상, 그는 더 이상 과거의 삶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조작된 세상 속 진짜 인간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트루먼 쇼]에도 가짜 달이 등장한다. 가짜 폭풍우, 가짜 태양뿐 아니라 가짜 친구, 가짜 애인까지 등장한다. 모든 것이 모조품이지만 예쁘고, 모든 인간은 가짜이지만 친절하고, 철저히 조작되었기에 안락하다.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의 변덕스러움도 없고, 재앙을 걱정할 일도 없으니, 도무지 근심이 없는 유토피아다. 그곳의 허상을 견디지 못한 진짜 인간 트루먼과 실재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리카는 대비되지만, 이들이 겪는 괴리는 닮아 있다. 트루먼이 떠난 그곳에 리카를 놓아주고 싶다. 혹여, 이미 혼자만의 ‘트루먼 쇼’에 사는 걸지라도, 그가 그렇게 믿는 것으로 해방되었다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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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하늘 달마저 땅으로 끌어내리는 인간의 욕망 앞에서 한 주부의 일탈은 시시할 수도 있다. 허영으로 시작된 리카의 일탈은 윤리적으로 타락했지만, 분명 어떠한 굴레로부터 해방됐기 때문에 사소하지 않다. 아마 그가 진정으로 벗어나고 싶었던 굴레는 ‘우메자와 리카’라는 자기 자신이었을 것이다. 원작 소설에서는 이것을 ‘자유’라고 정의했다. 그리고 처음 자유를 손에 넣은 리카는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스미에게 ‘같이 가겠냐’는 질문을 건넨다. 이는 동행을 위한 물음이 아닌, 억눌린 욕망과 본성을 자극하는 도발에 가깝다. 그때, 관객 또한 자신의 욕망과 본성의 생사를 확인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