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이별은 사랑의 부재에 따른 결과라고 생각한다. 감정이 식었거나 더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거나. 뭐가 됐든 더 이상 사랑하지 않으니 관계를 끝낸다는 게 보편적인 이별의 정의다. 그러나 사랑하는데도 이별한다면? ‘널 사랑해서 떠나는 거야.’ 한때는 비겁한 변명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래 영화들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이번에 소개할 영화들은 이별을 둘러싼 다양한 상황과 대처 방식을 그린다. 보고 나면 이별에 대한 생각이 공고해지거나 혹은 바뀔지도 모른다.

백조의 노래 – 사랑이라는 곡의 피날레

이미지: 애플tv+

불치병 진단을 받은 캐머런 터너가 아내와 자식들을 위해 실험적인 치료법을 택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 [백조의 노래]. 다가오는 죽음에 고민하던 캐머런은 한 박사를 찾아간다. 박사는 완치는 불가능하지만 클론으로 그의 삶을 이어갈 수 있다고 제안한다. 복제는 아무도 모르게 은밀히 진행된다. 이후 클론은 복사된 기억으로 캐머런의 존재를 완벽하게 대체해 나갈 것이다. 과연 캐머런은 가족의 행복을 위해 존재의 상실을 감당할 것인가?

[백조의 노래]가 특별한 점은 이별이 일방적이라는 것이다. 포피와 캐머런의 이별은 후자에게만 적용된다. 오직 캐머런의 세계만 사라지기 때문이다. 캐머런이 떠나도 포피의 시간은 그대로 흐르고, 오직 캐머런 만이 이별의 아픔을 감당한다. 상실은 남겨진 자의 몫이라는 개념을 뒤집는 셈이다. 캐머런은 아내 대신 홀로 죽음을 감당하겠다는 각오로 클론을 선택했다. 그러나 자신과 똑같이 생긴 남자가 아내의 곁을 차지하자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힌다. 아내를 위해 스스로를 내려놓기로 결심했지만, 역설적으로 이러한 결심이 묻혔던 욕구를 자극한 것이다. 영화는 캐머런의 감정 변화와 행동의 모순을 그려내면서 사랑과 이별, 희생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영화는 캐머런이 클론의 귀와 눈을 통해 아내의 진심을 전해 들으며 끝난다. 이때 그가 흘린 눈물이 무력감이나 억울함이 아닌 안도의 눈물이라는 점에서 질문에 대한 답을 알 수 있다.

대체불가 당신 – 남겨질 당신을 위한 이별

이미지: 넷플릭스

직전 작품처럼 [대체불가 당신]도 시한부 환자와 남겨질 연인의 관계를 그린다. 단, [대체불가 당신]의 주인공인 애비는 자신의 죽음을 숨기지 않고 약혼자 샘을 위해 적극적으로 미래를 대비한다. 그 방법이 다소 독특해서 우여곡절을 겪기는 하지만. 샘과 애비는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20년에 가까운 세월을 함께 보냈다. 자신이 떠나고 외로워할 샘을 위해 애비는 직접 여자친구를 찾아 주기로 결심한다. 샘 몰래 소개팅 어플에 계정을 만들고 여자들을 만나며, 바람둥이 친구와 파티에 보내기도 한다. 동시에 애비는 시한부 환자로 구성된 취미 모임에서 마이런이라는 개성 넘치는 할아버지를 만나 우정을 쌓아간다.

모순적이게도 이별은 샘과 애비를 더 가깝게 만들었다. 둘은 어린 시절부터 함께 지냈기에 줄곧 평탄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하지만 이별을 앞두고 비로소 갈등을 겪으면서 둘은 서로를 더 알게 됐다. 두려움에 드러난 내면을 마주하면서 서로의 진심을 확인하고 성숙해졌다. 애비가 호기롭게 샘의 다음 여자친구를 물색한 이유는 남은 사랑을 덜어내기 위함이다. 그러나 사랑이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커지는 것을 자각하고 혼란을 느낀다. 마침내 애비는 남겨질 연인을 위한 최선이 무엇인지 깨닫고, 사랑을 온건히 간직한 채 샘과 평화로운 이별을 맞는다.

라라랜드 – 현실과 이상의 교차로

이미지: 판씨네마

제89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6관왕을 차지한 [라라랜드]는 배우 지망생 미아와 재즈 피아니스트 세바스찬이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에 만나 성장하는 로맨스 영화다. 미아는 카페 아르바이트를 하며 배우의 꿈을 좇지만, 번번이 오디션에 낙방하면서 한계에 몰린다. 전통 재즈 클럽을 여는 게 꿈인 세바스찬은 넉넉지 않은 잔고 사정에 그 꿈을 유예 중이다. 그랬던 세바스찬에게 전국 투어 제안이 들어오고, 미아 역시 일인극을 연출하면서 둘은 멀어진다. 현실과 이상이 일치한다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미아와 세바스찬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둘은 끝내 꿈을 이루지만, 그 과정에서 아픈 대가를 치른다.

[라라랜드]가 많은 이의 인생 영화가 된 데에는 할리우드의 감성을 담은 영상미와 감미로운 음악이 한 몫 했지만, 엔딩을 빼고 말할 수 없다. 미아와 세바스찬은 꿈을 공유하면서 가까워졌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꿈 때문에 헤어졌다. 초반 낭만주의자로 그려진 세바스찬은 안정적인 미래를 위해 현실과 타협하고, 반대로 현실주의자 미아는 꿈이라는 가녀린 빛을 마저 좇는다. 엔딩에서 미아는 가지 않았던 길을 상상하고, 피아노 연주를 마친 세바스찬은 미아를 향해 희미하게 웃는다. ‘오래오래 함께 행복하게 살았다’는 동화 같은 결말은 이별로 완성되지 못했다. 하지만 둘은 각자의 위치에서 해피 엔딩을 만들어 냈다. 가장 찬란하고 따스했던 그해 여름을 가슴에 품은 채 말이다.

헤어질 결심 – 이별로 시작된 사랑

이미지: CJ ENM

박찬욱 감독의 최근작 [헤어질 결심]은 담당 형사와 용의자로 엮인 해준과 서래를 그린 미스터리 로맨스 영화다. 서래는 해준이 자신을 의심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스스럼없이 대한다. 해준은 그런 서래의 모호함에 호기심을 느낀다. 어느덧 호기심은 호감으로 변하고 사랑으로 발전한다. 그러나 해준이 직접 종결한 사건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면서 둘의 관계는 흔들린다.

대게 사랑은 이별을 고하면서 끝나지만, 서래의 사랑은 해준과 헤어진 순간 시작됐다. 사랑에도 시차가 있는 것이다. 해준은 서래를 위해 직업적 신념을 포기하고 붕괴해 버렸다. 이와 함께 해준의 사랑은 마침표를 찍었고, 서래는 그 마침표를 지우려 한다. 해준이 평생 잊을 수 없는 미제 사건으로 남기를 택하면서. 해준과 서래에게 이별은 끝이 아닌 시작이다.

 블루 발렌타인 – 결혼을 통해 바라본 사랑의 탄생과 소멸

이미지: 영화사 진진

그 어느 커플보다 로맨틱한 연애 끝에 결혼한 신디와 딘이 현실적인 문제들로 지쳐가는 모습을 그린 영화 [블루 발렌타인]. 의대생 신디와 이삿짐센터 직원 딘은 달콤한 사랑을 속삭이며 결혼한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폭풍이 지나가고 남은 건 버거운 현실이었다. 둘은 끊임없이 희생해야 하는 생활에 지쳐가고 결국 파국을 맞는다.

영화의 제목은 심장과 대비되는 차가운 ‘블루,’ 그리고 금혼령 시기에 몰래 결혼식을 올려준 사제 발렌티노의 결합이다. 마치 따뜻한 아이스크림처럼 대조되는 이 제목은 뜨겁게 달아올랐다가 식은 신디와 딘의 사랑을 요약한다. 영화는 신디와 딘의 첫 만남부터 마지막 순간을 카메라에 담으면서 지금도 어딘가 벌어지고 있을 사랑의 탄생과 소멸을 그렸다. 흔히들 결혼 전과 결혼 후가 다르지 않아야 하고, 변함없는 모습이 미덕이라고 입을 모은다. 그러나 [블루 발렌타인]은 사랑을 지속하려면 때론 변화를 감수해야 한다고 말한다. 신디는 더 나아질 기미가 없는 쳇바퀴 같은 생활이 힘겨웠고, 딘은 그런 신디를 이해하지 못했다. 결국 체념한 딘과 신디가 서로에게 씌워진 올가미를 풀어주면서 씁쓸한 엔딩을 장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