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혜연

[부산행] 이미지: (주)NEW

연상호 감독이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정이]로 또 한 번 자신의 유니버스를 확장시켰다.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시작해 상업 실사 영화 및 드라마를 꾸준히 연출하고 있는 연상호 감독은 OTT 플랫폼 서비스에 가장 최적화된 감독이라는 평을 받기도 한다. 2023년에는 영화 [정이]를 비롯해, 일본 SF 만화를 영상화한 드라마 [기생수: 더 그레이], 극본을 맡은 미스터리 드라마 [선산]도 넷플릭스에서 공개될 예정이다. 다소 마이너한 소재들과 기괴하고도 염세적인 연출, 파격적인 세계관이 OTT 유저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듯하다. 특유의 음울함 속에 장르적 매력을 선사하는 연상호 감독의 유니버스, 일명 ‘연니버스’를 파헤쳐 보자.

돼지의 왕(2011)

이미지: KT&G 상상마당

중학교 시절 괴롭힘을 당하며 학교생활을 하던 종석과 경민이 15년 후, 과거의 비극에 대한 충격적인 진실을 마주하는 [돼지의 왕]. 학교폭력 피해자인 종석과 경민 앞에 전학생 철이가 등장하고, 철이는 가해자 패거리를 제압하며 둘의 우상이 된다. 하지만 소년들의 복수는 점차 삐뚤어진 방향으로 향하고, 결국 끔찍한 파국을 맞게 된다. 학교폭력을 비판하는 동시에 계급에 대한 풍자까지 녹여낸 작품이다. 잔혹한 복수극 스토리에 거칠고 현실적인 비주얼이 더해졌고,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절묘한 교차편집이 긴장감을 조성한다. 다듬어지지 않아서 더욱 생생한 목소리들은 배우 오정세와 양익준의 것이다. 2022년에 티빙에서 드라마로도 제작되었으며, 한국 장편 애니메이션 사상 처음으로 칸 영화제 감독주간에 초청되는 역사적인 쾌거를 안기도 했다.

사이비(2013)

이미지: (주)NEW

종교와 인간관계에 관한 가장 솔직하고 신랄한 이야기를 그린 [사이비]. 사이비 교단을 운영하는 사기꾼 장로가 기적을 빙자해 마을 주민들의 보상금을 노리고, 그의 정체를 유일하게 알고 있는 주정뱅이 폭군이 그에 맞서 싸운다. ’본격 사회 고발 애니메이션’이라는 포스터의 문구가 과하지 않을 만큼 극사실적인 묘사를 보여준다. 악인은 평범한 사람들을 무엇으로 현혹하며, 악과 악의 대립 속에서 그 평범한 사람들은 누구를 믿을 것인지, 그 믿음은 정말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인지, 시종일관 날카로운 질문들을 던지며 민감한 종교 문제를 다루었다. [사이비]의 더빙 역시 양익준, 오정세, 권해효, 박희본, 황석정 등 전문 성우가 아닌 배우들이 맡았다. 작품은 시체스 국제영화제, 들꽃영화상 등 다수의 영화제에서 주목을 받았으며, 2019년에는 드라마 [구해줘 2]로 제작되기도 했다.

부산행(2016)

이미지: (주)NEW

전대미문의 재난이 대한민국을 뒤덮은 가운데, 부산행 열차에 몸을 실은 사람들의 생존을 건 치열한 사투를 그린 재난 블록버스터 영화 [부산행]. 공유, 정유미, 마동석 등이 주연을 맡은 한국 최초의 좀비 블록버스터 영화로, 제작비가 100억을 뛰어넘었으며 칸에서 최초 공개 후 뜨거운 반응을 일으켰다. 국내 개봉 당시에도 입소문에 힘입어 천만 관객을 돌파했다. 전문 댄서들이 좀비 엑스트라로 참여해 그들의 엉킨 몸짓을 묘사했고, 디테일한 특수분장과 CG 작업으로 실감 나는 재난 블록버스터를 구현했다. 각양각색의 액션뿐만 아니라 따뜻한 휴머니즘까지 느낄 수 있으며, 이 작품으로 연상호 감독은 백상예술대상에서 신인감독상을 수상했다. 또한 시체스 국제영화제, 춘사영화상, 디렉터스컷 어워즈 등 다수의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았다. [부산행]의 초석은 프리퀄 애니메이션 [서울역]이었으며, ‘연니버스’의 시간은 [서울역]에서 [부산행]은 물론, 단편 애니메이션 [집으로], 만화 [631], 그리고 영화 [반도]로 이어진다.

반도(2020)

이미지: (주)NEW

굶주린 좀비가 들끓는 도심, 폐허가 된 땅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반도를 탈출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잡고 필사의 사투를 벌이는 [반도]. 강동원, 이정현, 권해효, 이레 등 전 세대를 아우르는 배우들이 캐릭터에 새로운 색깔을 입히고 숨결을 더했다. 영화는 들개처럼 살아남은 생존자들, 폐허 위에 군림한 무법자들, 좀비보다 더 위협적인 존재가 되어버린 미쳐버린 자들까지, 저마다의 얼굴로 살아남은 다양한 인간 군상의 모습을 긴박하게 보여준다. [부산행]의 4년 후 세상을 그렸으며, 한국 최초의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관을 보여준다. 재난 후의 이야기는 ‘이성이 무너지고 야만성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인간적인 것은 무엇인가?’라는 연상호 감독의 물음에서 출발한다.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폐허의 땅이지만, 그럼에도 감독의 답은 희망적이고, 인간적인 방향으로 나아간다. 더욱 커진 스케일과 속도감 넘치는 액션, 세대를 뛰어넘는 배우들의 ‘원 팀플레이’를 감상할 수 있다.

지옥(2021)

이미지: 넷플릭스

기이한 존재로부터 지옥행을 선고받은 사람들과 충격과 두려움에 휩싸인 도시의 대혼란을 그린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지옥]. 비밀스러운 종교단체는 신의 심판을 외치며 세를 확장하려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사건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분투한다. 연상호 감독의 웹툰 [지옥]을 원작으로 한 공포 시리즈로, 양익준, 유아인, 박정민, 김현주, 김신록 등 연상호 사단의 배우들이 함께 한다. [사이비]가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파고들었다면, [지옥]은 신과 인간의 관계를 파고든다. 죄의 기준은 어디에 있는지, 인간이 납득할 수 없는 신의 처벌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등 심오한 물음들을 던진다. 수많은 추측을 남기며 시즌 1이 마무리되었고, 현재 시즌 2의 제작이 확정되었다.

정이(2023)

이미지: 넷플릭스

종말이 닥친 22세기 지구, AI 기술을 개발하는 연구소 팀장이 내전을 끝내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정이]가 지난 1월 공개되었다. 폐허가 된 지구를 떠난 인류는 우주에 새로운 터전 ‘쉘터’를 만들어 이주하고, A.I. 전투 용병을 개발해 끝없는 복제와 계속되는 시뮬레이션을 거듭하며 거대한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약 200억의 제작비가 투입된 [정이]는 정교한 촬영, 조명, 세트, VFX 효과를 통해 빼어난 시각적 효과를 보여줬으며, 스토리는 짧은 공상과학 소설을 연상케 한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배우 강수연의 유작으로 남게 되어 더욱 의미 있는 작품으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