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혜연

이미지: (주)시네마서비스

한국 멜로 영화의 전성기였던 2000년대 초반, 허진호 감독은 [8월의 크리스마스] 성공 후 이영애, 유지태 주연의 멜로 영화 [봄날은 간다]를 내놓는다. 온도와 속도가 다른 두 남녀의 만남과 이별을 현실적으로 그려낸 [봄날은 간다]는 개봉 2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한국 멜로 영화의 중심에 놓여 있으며, 배우와 감독 모두의 인생작으로 꼽힌다.

나는 또 한 번의 봄날을 보내며 이 영화를 다시 틀었다. 볼 때마다 새로운 여운이 밀려온다는 작품답게 보이지 않던 몸짓과 표정들이 보였고, 이해되지 않던 마음들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나 역시 계절처럼 변하고 있다는 증거일 테다. 이번 봄에는 ‘사랑의 변덕스러움마저 사랑하라’는 사랑의 잔인한 속성을 처음으로 배운 듯하다.

영화 속에는 구질구질하고 찌질하기까지 한 소년 같은 남자와 이미 서글픔을 알아버린 듯한 소녀가 아닌 여자가 등장한다. 사운드 엔지니어와 라디오 PD로 겨울에 만난 두 사람은 자연 속에서 숲을 보고, 사람을 만나고, 그들의 소리를 듣는다. 그들은 이렇게 서울과 강릉을 오가며 자연스럽게 혹은 너무 쉽게 사랑에 빠진다. 그것도 불공평한 크기로 말이다. 소년 같은 상우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은수에게 빨려들지만, 이혼 경험이 있는 은수는 상우에게 결혼할 생각이 없다며 부담스러운 표정을 내비친다. 그렇게 두 사람의 관계는 봄을 지나 여름을 맞이하면서 삐걱거린다. 그러니까 수줍음으로 붉게 물든 봄이 아닌, 서늘하고 시퍼렇던 봄날의 이야기인 것이다.

과연 봄날이 누구에게 더 서늘하고 시퍼렇냐고 묻는다면, 나는 은수라고 답한다. 분명히 은수가 상우를 덜 사랑했고, 은수가 상우보다 덜 절실했고, 덜 아팠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남겨진 사람이 더 아프고, 떠나간 사람이 덜 외로운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이 알 수 없는 여자의 마음과 그런 은수를 보며 ‘왜 그랬는지 알 것 같아’라고 말하는 여자들의 마음을 이제서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쩐지 쉽게 사랑하고 쉽게 버리기도 하는 듯한, 누군가와 함께이고 싶어 하면서도 쉽게 변하는 듯한, 복잡한 여자 ‘은수’의 마음을 천천히 읽어보려 한다.

아는 여자, 모르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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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고 묻는 상우에게 은수는 그저 “헤어져”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영원히 변할 것 같지 않던 사랑이 변하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우는 어찌할 바를 모른다. 은수를 잊지 못하는 상우는 미련과 집착의 감정을 이기지 못하며, 본격적으로 구질구질하고 찌질한 연애사를 써내려간다. 술에 취해 문을 두드리며 소리를 지르고, 아이처럼 엉엉 울기도 하며, ‘나 지금 힘들어요’를 온몸으로 울부짖는다. 어느 노랫말처럼 읽기 쉬운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상우의 것일 테다. 극중 상우는 이렇게 서툴지만 늘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때로는 부담스럽게 표출한다.

하지만 가만히, 가만히 놓여 있는 은수의 마음은 도저히 읽히지 않는다. 무심한 듯하다가도 라면을 먹자며 집에 들이고, 자신도 모르게 화를 낸 후에는 그의 어깨를 가만히 토닥이며, 꼭 이대로 그의 사랑을 받아줄 것처럼 하다가 달아나 버린다. 이것은 은수의 변심이 아니라 본성일 것이다. 은수는 이혼이라는 실패를 경험했기 때문에 더욱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런 은수에게 어떻게 사랑이 변하냐는 숨이 막히는 물음 대신, 차라리 변하기 전까지만 사랑하자는 부드러운 말을 건넸다면 어땠을까. 사랑의 변덕스러움을 인정하는, 느슨하고 여유로운 고백 말이다.

이혼이 곧 실패라고 여겨지는 사회에서, 어쩌면 자책이 뒤따랐을 그 경험 속에서, 은수는 차라리 모호하고 흐릿한 형태의 무엇을 원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사랑도 필요했지만, 사랑만큼의 여유도 필요했던 셈이다. 분명 지나친 욕심일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상우는 은수의 그것을 알아챌 수 있는 남자가 아니었고, 우리 앞에 닥칠 무수한 경우의 수들을 헤아릴 여유도 없어 보인다. 아마 두 사람이 헤어지지 않았다고 해도 상우는 은수의 이따금 치밀어 오르는 헛헛함을 감당할 수 없었을 테고, 은수는 이미 그것을 알고 있는 여자였다.

봄날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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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 한때는 상우로 살았고, 사랑하고 살아가며 은수로 자라난다. 무료하고 무료한 여자는 앞뒤 가리지 않는 남자의 열정이 잠시나마 사랑스럽겠지만, 결국 자신의 인생과 맞물려 버겁게 느껴진다. 이기적인 걸까, 익숙한 걸까, 어쩌면 시시한 인간이 된 걸까. 아무래도 은수는, 그리고 우리는 시시한 인간이 되어가는 것 같다. 모든 것에 날카로이 덤비던 시절을 지나, 말랑말랑한 마음을 만들고 허무는 일도 반복하며, 결국 혼자라는 사실을 깨닫고, 우리 참 시시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어진다. 단지 그것뿐이다. 누가 부족해서, 못나서가 아니라.

다시 온 봄날, 은수는 상우에게 사시사철 변하지 않는다는 사철나무를 선물한다. 우리가 아는 은수와는 어울리지 않는 선물이다. 내 안에 작게나마 남아 있던 순정과 순수를 되찾아줘 고맙다는 인사일까, 너만은 이 나무처럼 그리고 지금처럼 변하지 말라는 당부의 인사일까. 그게 무엇이었듯 상우는 그것을 받지 않고, 은수의 마음은 결국 은수 자신에게로 되돌아온다. 상우는 사랑했던 여자를 보내주며, 평생 할아버지를 그리워하던 할머니도 보내드린다. 사랑은 늘 변하고, 사람은 늘 보내야 한다는 것을 이제는 상우도 알게 된 것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벚꽃길에서 이별하며 봄날을 보내준다.

이 쓸쓸한 엔딩 장면에서, 허진호 감독은 상우 역을 맡은 배우 유지태에게 뒤돌아보지 않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유지태는 “저는 뒤돌아봐야겠어요. 26살 청년은 돌아볼 수밖에 없어요. 안 돌아보는 건 감독님 마음 같아요”라며, 결국 은수의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 은수 역을 맡은 배우 이영애는 이 영화를 “어려운 수학 문제” 같았다고 말하며, 은수라는 캐릭터에 대해서는 ‘복잡하다’고 결론지었다. 이렇게 영화 [봄날은 간다]에는 스물넷 유지태와 스물아홉 이영애의 풋풋함, 그리고 허진호라는 애틋함이 담겨 있다. 언젠가 또 다른 봄날이 오면 다시 생각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