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자에게 태국의 영상 콘텐츠는 공포 장르의 영화와 독특한 CF로 신선하게 다가왔다. 하지만 이후 완성도의 단단함이 없는 양산형 장르물의 범람으로 실망감도 커졌다. 최근에 봤던 태국 드라마나 영화는 억지스러운 전개와 배우들의 어설픈 연기력으로 보는 내내 안타까운 심정이 들었다. 하지만 최근 넷플릭스 신작 중에 독특한 소재와 새로운 장르에 도전하는 태국 영화가 있어 눈길을 끌었다. 한국에서도 현재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헝거]다. 과연 이 작품은 점점 허기지는 태국 영화들 속에 지금의 배고픔을 달랠 수 있을까?
영화 [헝거]는?

[헝거]에 대한 리뷰 전 누가 메가폰을 잡았고, 어떤 배우가 출연하는지 간단하게 설명해본다. 영화는 공포와 멜로가 함께하는 [귀수동화]로 호평을 받았던 시티시리 몽콜시리 감독이 맡았다. 여기에 배우 추티몬 추엥차로엔스키잉(이하 추티몬)이 작품의 타이틀롤을 책임진다. 그는 성공한 요리사가 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주인공 ‘오이’를 연기하는데, 그런데 잠깐. 이 분 어디서 많이 보지 않았는가? 그렇다. 추티몬은 2017년 천재소녀의 부정행위를 소재로 한 [배드 지니어스]에서 주인공을 맡았던 배우다. 이번 작품에서도 전작 못지않은 돋보이는 연기로 극을 책임진다.
본격적으로 이 작품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영화 제목 [헝거]는 스타 셰프 ‘폴’이 운영하는 유명한 파인 다이닝의 이름이다. 영화의 시작에서 셰프 폴은 진정한 승자는 가장 허기진 사람이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허기’는 전체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와 연관이 깊은 단어다. 주인공 오이가 특별한 셰프가 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부자들과 유명 인사들이 스타 셰프를 찾게 하는 모티브다. 1차원적인 배고픔이 아니라, 자신에게 채워지지 않은 그 무엇을 갈망하는 허기, 바로 그 자체다.
아버지의 국수 맛집을 이어받아 운영 중인 요리사 오이는 주변 친구들처럼 희망이 보이지 않는, 그렇고 그런 평범한 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청년이다. 이런 그에게 ‘헝거’ 측에서 스카우트를 제안한다. 오이에게 있어서 이 제안은 가업을 포기하면서까지 특별한 사람으로 거듭날 거절하기 힘든 유혹이었다.
그렇게 오이는 시장을 떠나 화려한 주방에서 자신의 성공을 향해 나간다. 폴 셰프로부터 혹독한 테스트와 가르침을 받지만, 오히려 이것이 큰 자극제가 된다. 그렇게 한 걸음씩 셰프로 성장해 가던 오이는 동경하던 스타 셰프의 여러 다른 모습들로 실망하고 결국엔 스폰서의 도움을 받아 독립하게 된다. 화려하게 성공 가도를 달리던 오이는 롤모델이었던 스승 폴과 음식 대결을 하는 위치까지 오른다. 과연 이 대결의 승자는 누가 될까? 그 결과는 직접 영화 속에서 확인하시길 바란다. 이처럼 영화는 2시간 10분의 짧지 않은 상영시간를 효과적으로 요리(!)한다. 음식과 요리를 주제로 한 기존의 영화와는 다른 긴장감과 철학적인 질문으로 색다른 경험과 생각을 건네면서 말이다.
스타 셰프를 찾는 이유는 맛있는 음식 때문일까? 특별함 때문일까?

영화에서 유명 인사와 부자들은 폴 셰프를 찾아 만찬을 의뢰하고 즐긴다. 고급 레스토랑을 배경으로 한 영화에 으레 있는 일이다. 하지만 눈에 띄는 점은 그들의 식사 장면에 대한 묘사다. 영화는 이들이 폴 셰프의 음식을 먹을 때 지저분하고 게걸스러운 모습으로 비춘다. 처음에는 음식이 맛이 좋다는 걸 저렇게 표현했나 싶었지만 아니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이 원하는 것은 음식이 아닌 특별함을 갈구하는 모습이라는 것을 관객들이 깨닫게 한다.
영화에 묘사되는 유명 인사와 부자들은 그들에게 걸맞은 특별함과 지위를 나타내기 위해 스타 셰프를 찾는다. 그리고 폴은 스타 셰프의 특별함을 지키기 위해 음식에 대한 진정성, 법과 도덕도 버리는 모습을 가차 없이 보여준다. 특별함을 얻기 위해 포기해야 하는 것들은 너무나도 많았다. 가족도 동료도 폴에게는 이제는 남아있지 않았다. 특별한 요리사를 원하는 고객은 정작 그의 요리에 관심이 없다. 오로지 자신을 과시하고 싶은 욕망을 채우기 위해 요리사의 ‘특별함’ 만이 필요할 뿐이다. 요리의 본질적인 의미가 욕망의 집착으로 퇴색되어가는 과정을 영화는 진지하게 그린다. 요리, 음식 영화임에도 작품을 보고 나면 맛의 욕구보다 멋의 무색함을 더 곰곰이 생각해보게 한다.
음식이 잃지 말아야 할 진정한 의미

한편 오이는 그토록 원하던 특별한 요리사의 명성을 얻으며 다른 요리사와는 다른 자신의 색깔을 찾기 위해 매진한다. 그런 그가 찾은 건 시장에서 본인이 요리할 때 사용하던 웍이었고, 그 기구로 요리한 음식들은 폴과는 다른 차별점을 만들어 낸다.
유명 인사들 앞에서 스승 폴과 요리 대결을 하면서 그는 화려하지 않지만 진정한 특별함을 가진 음식을 내놓는다. 시장에서 아버지가 만들어 주던 ‘징징이국수’로 미식을 즐기던 이들에게 가족의 사랑과 편안함을 불러일으킨다. 음식이 어느새 누군가의 부의 상징으로 타락하던 그때, 맛있는 음식으로 삶을 위로하는 진정한 의미를 스승과 다른 모습으로 보여준다. 이처럼 [헝거]는 음식에 대한 사람들의 욕망과 허상을 그리며 이와 대비되는 평범하고 소소한 가족의 사랑을 따뜻하게 강조한다. 우리가 추구하는 진정한 가치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도 제시한다. 음식과 요리사를 통해 사회 계층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인간의 욕망과 허영심도 꼬집는다. 어쩌면 이런 점이 [헝거]를 숨은 맛집 같은 영화로 만드는 건 아닐까.
배고픔을 완전히 채워주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현재 넷플릭스 영화 순위 상위에 랭크된 [헝거]는 기존 태국 영화와는 다른 색다른 소재와 주제로 필자의 이런 바람을 일정 부분 충족시켜 주었다. 음식과 요리에 대한 메시지도 좋았다. 하지만 옥에 티도 있다. 주인공 오이를 제외하고는 인상적인 캐릭터가 없고, 태국 배우들 특유의 연기 스타일이 어색하게 다가와 극의 몰입을 방해한다. 인간 욕망에 대한 허상과 이면을 날카롭게 전달하는 것에 비해 몇몇 미숙한 연출은 영화의 몰입도에 방해요소로 작용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사운드나 시각효과를 활용한 연출은 인상적이다. 특히 요리를 소재로 했음에도 스릴러와 같은 긴장감을 이끌어 낸 점은 놀랍다. 오이와 폴의 대립 관계로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극대화하는 모습 또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웰메이드 태국 영화를 만나고 싶은 허기짐을 이 작품이 100% 채우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당장의 배고픔을 어느 정도 가시게 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