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건?

최근 챗GPT 열풍이 뜨겁다.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인공지능 챗GPT가 어떤 질문에도 아주 자연스러운 답변을 내놓고 있기 때문이다. 기존 상업용 챗봇은 약간의 변수에도 버벅거렸고 말투 역시 기계라는 티를 풍겼다. 반면 챗GPT는 사람 같은 대화가 가능하다. 심지어 변호사 시험을 통과할 만한 수준의 글을 작성한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림과 음악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고유 영역으로 느껴졌던 창작마저 인공지능이 능숙하게 처리해 내고 있다.
기계와 인간의 영역이 점점 모호해지는 가운데 둘을 구분하는 기준이 무엇인지 의문이 들었다. 이어서 무엇이 인간의 자아를 형성하는지 궁금해졌고, 생각은 자연스레 작년에 완독한 소설 『미키 7』로 이어졌다. 봉준호 감독이 각색과 연출을 맡아 2024년 영화로 개봉될 『미키 7』은 복제 인간의 이야기다. 위험한 임무를 도맡아 하는 주인공 미키는 사망하면 새로운 육체로 다시 태어나고, 이전의 기억은 백업된 데이터를 통해 계승된다. 이 탓에 미키는 ‘불멸의 존재’로 인식되고 주변인들도 일곱 번째 미키와 여덟 번째 미키를 동일 인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정작 미키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미키7과 미키8은 서로를 다른 개체로 생각했다. 외모는 100% 같고 기억도 거의 동일했지만 둘은 성격이 달랐고 이로 인해 행동 양식도 크게 갈렸다. 왜 그럴까? 미키 7이 습득한 감각과 지나온 여러 사건사고는 그의 자아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미키8에게는 그저 타자화된 정보에 불과했다.
미키가 복제인간이 되기로 결심했을 때, 면접관은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기억이 남아있는 한 진짜 죽은 게 아니’라고. 그렇다면 매일 밤 기억을 잃는 사람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기억이 인간의 자아를 좌우한다면 새로운 기억을 축적할 수 없는 인간은 무엇으로 살아가야 하는가? 로맨스 영화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가 던지는 질문들이다.
오늘 밤, 이 영화를 봐야 하는 이유

국내에서 11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영화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는 자고 일어나면 전날의 기억을 잃는 ‘선행성 기억상실증’에 걸린 소녀 마오리(후쿠모토 리코)와 무색무취의 평범한 소년 토루(미치에다 슌스케)의 사랑 이야기다.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학교를 다니는 고등학생 토루는 느닷없이 동급생 마오리에게 고백한다. 사실 이는 친구를 괴롭힘에서 구하기 위한 억지 고백으로 토루는 마오리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그러나 예상외로 마오리가 고백을 받아들이면서 상황은 돌변한다.
사실 마오리가 고백을 받아들인 이유는 토루를 좋아해서가 아니다. 매일 밤 기억을 잃어버리는 자신이 연애를 할 수 있을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오리는 토루에게 계약 연애를 제안한다. 조건은 세 개다. 첫 번째, 방과 후까지는 서로 말 걸지 않기. 두 번째, 연락은 최소화할 것. 세 번째, 진짜로 좋아하지 말 것.
첫 번째와 두 번째 조건은 잘 지켜졌지만, 세 번째 조건은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마오리와 토루는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서로를 좋아하게 된다. 그리고 공원에서 피크닉을 하던 날, 낮잠에서 깬 마오리가 토루를 알아보지 못하면서 마오리의 기억상실증이 드러난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미 서로에게 너무 중요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토루와 마오리는 한시적이지만 그렇기에 더 아름답고 애틋한 추억들을 만들어 간다.
한편 영화는 토루의 가족을 통해 두려움을 마주할 용기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토루는 아버지와 단둘이 살며 집안일을 도맡아 한다. 누나가 있지만 자신의 꿈을 위해 집에서 독립한 상태. 여기서 두려움에 잠식된 존재로 그려지는 사람은 아버지다. 아내가 죽은 이후 소설가의 꿈에 매진하지만, 실상은 실패가 두려워 원고도 제대로 작성하지 못하고 가장의 책무도 외면한다. 그런 아버지를 보며 마음의 문을 닫았던 토루는 마오리에게 용기를 받아 대화를 나눈다. 그 과정에서 부자는 쌓여왔던 오해를 풀고 한 뼘 더 가까워진다.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속 사랑은 비현실적이지만, 그 속에서 보편적으로 생각해 볼 만한 이야기를 찾아볼 수 있다. 잠에서 깨면 그전 일을 잊어버리는 주인공과 그럼에도 사랑을 더 키워가는 연인. ‘내일의 마오리도 즐겁게 해줄 거야.’ 토루는 오늘 함께 보낸 시간을 잊어버릴 연인에게 서운함을 느끼기보다 내일도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결심한다. 마오리도 마찬가지다. 자는 동안 지워지는 기억을 아쉬워하고 후회하기보다는 현재에 집중하기를 택한다. 기억 장애를 받아들이되 좌절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에 초점을 맞추는 둘. 그래서 이들의 사랑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진해지고 단단해진다.

다시 챗GPT 이야기로 돌아 보자. 챗GPT가 사람 다운 답변을 내놓고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건 막대한 양의 데이터 덕분이다. 하지만 비트와 바이트로 이루어진 이 데이터가 정보 이상의 의미를 이끌어 낼 수 있을까?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고 해도]에서 주인공이 기억을 잃어버리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가족과 친구와 진심 어린 교류를 이어가고 나아가 진정한 사랑까지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의 경험이 단순히 정보에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경험하면서 느낀 감정, 그리고 그 감정을 교류한 상대와의 추억이 경험을 감싸기에 기억은 기록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인간다움이 기억에서 기인한다면, 그리고 그 기억을 데이터의 양으로 한정 짓는다면 인공지능과 인간을 구분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하지만 기억의 의미가 추억과 감정까지 포함한다면 둘 사이에 명백한 구분선이 그어지지 않을까? 사고로 기억을 잃는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기억의 유무보다는 그 기억을 누구와 어떻게 형성했는지가 핵심이다. 그렇기 때문에 토루와 마오리는 매일 밤 세계에서 사랑이 사라져도 다음 날 아침 사랑을 다시 써 내려갈 수 있는 것이다. 이들의 기적 같은 사랑을 보고 나니, 오늘 밤 나 역시 기억을 공유하고 소중히 여겨줄 사람을 떠올리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