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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17세기 네덜란드의 철학자 스피노자의 명언으로 알려진 문구다. 만약 정말 내일 종말이 도래한다면 태연하게 나무를 심을 수 있을까? 공포와 슬픔에 잠식되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덤덤히 나무를 심는 것처럼, 끝까지 포기 않고 일을 수행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지구가 다른 행성과 충돌하거나 우주에서 행성이 폭발하는, 이른바 초신성이 일어난다면 인류는 어떻게 반응할까. 둠스데이(종말의 날)를 묘사한 작품들은 대개 지하에 벙커를 구축하거나 소수의 선별된 사람들을 우주로 보내는 공식(예를 들면 [인터스텔라])을 따랐다. 하지만 지금 소개할 영화 [유랑지구]는 앞선 공식을 차용하면서 한 발짝, 아니 큼지막하게 세 발짝쯤 나아간다. 적색거성이 된 태양으로 인류의 존속이 위험한 상황이 다가오자 아예 지구를 태양계 밖으로 이동시키는 계획을 다루기 때문이다.

원작가 류츠신에 대해

본격적으로 영화를 설명하기에 앞서 원작자를 잠시 언급하겠다. [유랑지구]는 중국의 대표 소설가 류츠신의 동명 단편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컴퓨터 공학자 출신의 류츠신은 유수의 SF 소설을 집필했는데, 대표작으로는 2015년 휴고상을 수상한 「삼체」가 있다. 참고로 휴고상은 1953년 창설된 이래 당해 최고의 SF, 판타지 작품에 수여해 왔다. 앞서 「해리 포터」, 「듄」, 「엔더스 게임」 등이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자국 내 손꼽히는 SF 소설가였던 류츠신은 「삼체」의 휴고상 수상 이후로 전 세계에 이름을 알렸다. 「삼체」는 중국에서 드라마로 제작된 것에 이어 넷플릭스가 판권을 구입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삼체]는 2024년에 공개될 예정이다.

그런 가운데 [유랑지구]는 류츠신의 작품 중 처음으로 영화화된 작품이다. 작가의 높은 지명도와 획기적인 상상력은 [유랑지구]를 보기 전 기대감을 갖게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탓에 우려도 있었는데, 과연 소설의 방대한 서사를 스크린으로 옮길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었다. [유랑지구]는 제작비 약 650억 원이 투입된 중국 최초의 SF 블록버스터 영화로 홍보됐다. 결과적으로 영화는 이름값이 주는 기대에 걸맞은 재미를 건넸다. 지금부터 [유랑지구]의 줄거리와 매력 포인트를 찬찬히 살펴보자.

지구가 멸망하게 된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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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지구]는 지구의 기온이 영하 70도로 뚝 떨어진 근미래, 지구를 태양계 밖으로 옮기기 위해 유랑한다는 설정에서 시작한다. 범 지구적 위기 앞에 국가들은 단결하여 연합 정부를 창설하고, 각 국가마다 우주비행사를 선별해 우주정거장으로 보냈다. 이들은 약 15년 동안 지구를 목성 궤도에 진입시키는 임무를 수행하고 그동안 나머지 인구는 지구의 지하도시에 머물렀다.

주인공 ‘류치’(굴초소)의 아버지 ‘류페이창’(오경)이 지구로 귀환하기 하루 전, 인류는 다시 절체절명의 위기에 봉착한다. 두 차례 강진이 전 세계를 강타하고 아태 지각판에는 거대한 균열이 발생한 것이다. 게다가 목성 인력의 영향으로 지상에 있던 엔진 4771대가 멈춘다. 우주에 있던 모든 사람은 절전을 위해 동면에 들어가야 할 정도로 그 여파가 심각했다.

한편 류치는 여동생 같은 한둬둬와 함께 지하를 빠져나와 몰래 지상을 배회하던 중 한둬둬의 할아버지 한쯔상에게 발각된다. 이후 셋은 집으로 돌아가던 중 지진을 겪는다. 아수라장이 속에서 이들은 엔진 복구 임무에 투입된 팀을 맞닥뜨린다. 주변에 멀쩡한 차량이 없는 관계로 류치 무리와 복구팀은 핵심 엔진, 일명 ‘부싯돌’을 목적지에 옮기는 여정을 시작한다.

장르적 재미를 배가하는 압도적 스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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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지구]가 이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들을 연상시키는 것은 사실이다. 눈보라가 생명력을 갉아먹는 도시는 언뜻 [투모로우]를 닮았고 류치 무리의 도전은 [아마겟돈]을 연상시킨다. [유랑지구]는 스토리적으로나 비주얼적으로 온전한 독창성을 갖추지 못했으나 그럼에도 꽤 괜찮은 블록버스터다. 일단 스케일이 압도적이다. 4년에 걸쳐 완성된 영화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버금가는 시각효과를 선보인다. 특히 류페이창이 머무는 우주는 경이롭고 매력적이며, 후반부 류치 무리가 최후의 작전을 펼치는 통제 센터에서의 시퀀스는 가히 압도적이다. 여기에 미술 팀이 수작업으로 탄생시킨 1만 개가 넘는 소품이 세계관을 더욱 탄탄히 완성시킨다.

시각적 재미와 함께 독보적인 상상력이 영화를 더욱 풍부하게 만든다. 태양계의 이상 현상으로 지구에는 얼음이 뒤덮이고 여기에 목성 충돌까지. 그런데 이에 대한 해답이 다른 행성을 개척하는 게 아닌 지구를 통째로 옮기는 것이라니. 류츠신 작가는 비현실적인 아이디어를 과감한 스토리로 일구어 냈다.

물론 스토리상 아쉬움도 있다. 어쩌다 태양계가 소멸할 처지가 됐는지에 관한 설명이 생략됐다. 지구의 인구가 35억 명으로 줄어들었다는 설정 역시 대사 한 줄로 언급되고 넘어간다. 다행히 [유랑지구]의 성공으로 [유랑지구2]가 개봉했다. 속편이 아닌 프리퀄로, 지구 연합 정부가 창설되고 유랑지구 계획을 마련하는 과정을 그려내어 전편의 의문을 해소한다.

국뽕 없는 중국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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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적으로 [유랑지구]가 중국 외 관객에게 어필할 수 있는 이유는 정치적 요소를 제외했기 때문이다. 영화는 특정 국가가 나쁘다 혹은 좋다는 관점을 지니지 않는다. 어느 정도 ‘국뽕’은 있지만 가볍게 넘어갈 수 있는 수준에 그친다. 영화는 특정 민족이나 국가에 중점을 맞추는 대신 국적을 초월해 전 세계가 힘을 모아야 하는 상황임을 강조한다.

협동 작전이지만 빌런이 없다는 점도 흥미롭다. 각자 신념이 다를 뿐 명백한 악인은 없다. 다만 워낙 방대한 세계관이기에 풀어낼 이야기가 많아서 캐릭터의 입체감이 떨어진다. 특히 주인공인 류치의 서사에 깊이감이 부족해 이입하기 힘들다. 오히려 개그 담당인 마이클 스티븐 카이의 역할이 공감하기 쉬울 정도다. 류치의 곁에서 맴도는 한둬둬도 계속 키링 같은 존재로 비친다. 그나마 한둬둬는 막판에 부족했던 존재감을 채운다.

사과나무를 심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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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지구]가 특별한 또 다른 이유는 종말을 마주하는 자세를 다양하게 그려내는 데 있다. 누군가는 삶을 포기하고, 또 어떤 누구는 약탈을 서슴지 않으며 대부분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기를 소망한다. 영화에서는 인공지능 모스가 덤덤히 유랑지구 계획의 실패를 선고하며 지구가 소멸하기까지 7일 남았다고 전한다. 모스는 예측값과 확률을 근거로 유랑지구 프로젝트를 폐기하고 헬리오스 프로젝트 시행을 강행한다. 헬리오스 프로젝트란 지구를 버리고 새로운 행성에서 지구를 완벽하게 구현하는 구상이다. 행성이 준비되는 수천 년의 시간 동안 인류는 동면에 잠든다.

특이했던 것은 모스가 사무적인 어투로 지시하듯이 결정을 내려도 다들 군말 없이 따른다는 점이다. 수억 명의 목숨이 달려있는 문제인데 아무도 문제 제기를 하지 않는다는 점이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내 체념이 인류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희망이 아득하다면 포기하는 게 자연스럽다.

그러나 주인공과 팀원들은 좌절해도 일어나고 잇따른 실패에도 전진한다. 이들은 자신의 역할을, 임무를 완수하려 애쓸 뿐이다. 종말에 굴복하는 건 비겁하지 않고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럼에도 주인공은 무모한 도전을 이어간다. 결국 인류 생존에 필수 요소는 성공률 높은 계획 보다 한 줌의 희망이 아닐까? 아무리 성공률 100%여도 그것을 행할 의지와 희망이 없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