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랜만에 국내 극장가를 찾아온 홍콩 누아르가 있다. 웰메이드 범죄 드라마 [풍재기시]는 홍콩의 1960년대를 배경으로 두 명의 부패 경찰이 세운 범죄의 신세계와 일본 식민지 시대를 거치고 영국의 지배하에 힘들게 살아가는 격동적인 홍콩의 역사를 동시에 담아낸다.
이번 작품에 출연한 아시아의 레전드 배우 양조위와 곽부성은 뜨거운 연기 앙상블을 예고하며 그들을 기다린 영화 팬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양조위가 연기한 ‘남강’은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삼합회와 경찰 조직을 장악해 비즈니스 제국을 설계하려는 욕망을 가진 인물이며, 곽부성의 카리스마 짙은 연기로 탄생한 행동파 경찰 ‘뇌락’은 ‘남강’과는 상반된 거친 매력을 발산한다.
특히 이 작품은 올해 3월에 열린 아시아필름 어워즈에서 양조위에게 남우주연상을 안겨줬다. 2022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도 올해의 아시아영화인상을 수상한 양조위는 나이가 들면서 연기파 배우로 그 인기가 더욱더 확고해지고 있다. 이렇게 평생이 전성기인 배우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양조위의 레전드 대표작을 살펴보며 그의 발자취를 기억해 보자.
중경삼림(1995) – 경찰 663 역

1994년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은 실연을 겪은 두 남자 경찰을 주인공으로 구룡반도의 충킹맨션 주변을 배경으로 한 1부, 홍콩섬의 센트럴 지역을 배경으로 한 2부까지 2개의 에피소드를 옴니버스식으로 구성한다. 이 영화의 2부에서 양조위는 승무원 여친(주가령)으로부터 이별을 통보받은 경찰 663역으로 등장한다. 실연의 상처에 괴로워하면서도 자신을 짝사랑하는 패스트푸드 가게 점원 페이(왕페이)에게 사무적인 태도로 차갑게 대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탁월한 연기로 그려낸다.
영화 [중경삼림]은 홍콩을 배경으로 이별과 만남을 퇴폐적이고 탐미적으로 연출하며 세련되고 감각적인 미장센이 탁월한 영화로 기억된다. 상처를 딛고 새로운 사랑을 찾아가는 청춘들에 대한 왕가위 감독의 독특한 상상력을 4인 4색의 캐릭터로 표현하고, 이들을 연기한 배우들의 케미는 다시 보기 어려운 조합이다. 이 작품을 끝으로 은퇴한 ‘임청하’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점도 눈 여겨볼만하다.
해피 투게더(1998) – 아휘 역

1997년 왕가위가 연출하고 장국영과 함께한 [해피 투게더]는 양조위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 중의 하나이다. 홍콩을 떠나 지구 반대편 아르헨티나로 온 두 남자의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영화는 일반적인 사랑 이야기가 아닌, 이별과 만남을 반복하는 주인공들의 슬프고 아픈 지독한 감정을 깊이 있게 그려냈다.
왕가위 감독은 인물의 감정선을 세심하게 포착해낸 연출과 핸드헬드 촬영 기법, 흑백과 컬러를 교차시키는 과감한 편집으로 자신의 독보적인 작품세계를 펼친다. 그 결과 제50회 칸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하며 전 세계가 왕가위를 주목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해피 투게더]는 예민하고 쓸쓸한 얼굴을 꺼내든 양조위의 색다른 매력을 만날 수 있었던 작품이다. 격정적인 탱고 선율처럼 요동치는 감정선을 섬세하게 짚어낸 명품 연기로 제50회 칸영화제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고인이 된 장국영과 함께 열연을 펼치는 양조위의 간절한 사랑 연기는 지금 봐도 깊은 여운을 건넨다.
화양연화(2000) – 주모운/차우 역

2000년에 개봉한 영화 [화양연화]는 왕가위 감독 특유의 미장센이 빛을 발하는 작품이다. 배우로서 아우라와 매력을 지닌 양조위와 장만옥을 캐스팅하여 중년 남녀의 완숙한 사랑을 진중하게 담아낸다. 영화의 제목 ‘화양연화’는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한 시절을 은유하는 말로 두 주인공의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에 대한 그리움을 함축한다.
서로의 배우자가 불륜인 것을 알고 있는 두 주인공은 서로의 아픔을 이해하면서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이들이 관계가 관계인 만큼 그 마음을 쉽게 표현하지 못하고 고뇌하는 모습을 슬프도록 아름답게 그려낸 작품이다. 기존의 왕가위 감독의 연출과는 다른 극도로 절제된 대사, 신파로 빠지지 않는 연출, 정물화 같은 배경, 여기에 고전적인 음악과 양조위의 눈빛, 장만옥의 기품이 더해져 시대를 초월한 걸작으로 완성했다.
양조위는 지역 신문사의 편집 기자로 일하는 주모운 역을 맡았다. 아내의 불륜을 알고 고뇌하다가, 같은 처지의 소려진(장만옥)을 알게 되면서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을 갖게 된 캐릭터를 절도 있게 연기한다. 그는 [화양연화]에서의 열연으로 제53회 칸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거두었으며, 2000년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 게스트로 방문해 한국 팬들을 만났다.
무간도(2003) – 진영인 역

[무간도]는 가장 완벽한 누아르로 불리며, 90년대 동종 장르의 대표작인 [영웅본색] 이후 홍콩 영화 붐을 일으킨 작품이다. 영화는 경찰의 스파이가 된 삼합회 조직원 ‘유건명’(유덕화)과 삼합회의 스파이가 된 경찰 ‘진영인’(양조위)의 뒤바뀐 인생을 그린다. 기존의 홍콩 누아르는 화려한 총격전과 액션 중심의 영화이지만 [무간도]는 언더커버를 소재로 한 영화답게 액션이 아닌 상대를 쫓는 미행과 감시로 긴장감을 유발하며 몰입감을 더한다.
[무간도]는 홍콩 누아르의 새로운 이정표로 자리매김하며 이후 수많은 영화에도 영향을 주게 된다. 할리우드에서는 이 작품을 리메이크한 [디파티드]를 만들었고, 한국 영화 [신세계]도 [무간도]를 모티브를 했다. 언더커버를 소재로 한 많은 영화들이 아직도 [무간도]의 그림자에 기대고 있을 정도다.
양조위는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범죄 조직 내부에 들어간 경찰 진영인 역을 맡았다. 영화에서 양조위의 풍모는 그야말로 범접하기 힘든 무게감을 보여준다. [무간도] 시리즈를 향한 호평들이 많은데, 여기에는 유덕화, 양조위의 역대급 연기가 큰 몫을 차지했다. 특히 양조위의 존재감은 정말 대단했고 선과 악의 갈등, 불안감에 시달리는 인물을 치열하게 담아내어 보는 이가 영화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90년대 양조위의 팬덤을 왕가위가 만들었다면 2000년대 양조위의 팬덤은 [무간도]가 이어갔다.
색, 계(2007) – 이모청 역

2007년 이안 감독이 연출한 [색, 계]는 실화를 담은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역사적 흐름에 휘말린 개인의 미묘한 심리를 세밀하게 묘사한다. 64회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영화는 1938년 홍콩, 친일파의 핵심 인물이자 정보부 대장인 ‘이모청’(양조위)과 그를 암살하기 위해 막 부인으로 신분을 위장하고 접근한 ‘왕치아즈’(탕웨이)의 격정적인 관계를 멜로와 스릴러로 보여준다.
양조위는 친일파 이모청 역을 맡았다. 위엄 넘치고 냉정한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자신의 위치 때문에 언제 암살될지도 모를 불안감을 가진 캐릭터다. 그런 가운데 막 부인을 만나고 묘한 설렘 끝에 사랑의 쾌락에 빠지는 모습을 광기 어리게 표현해 작품의 분위기를 주도한다. 감정과 노출 모두 극한에 가깝게 연기한 양조위의 내공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