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항적인 눈빛 뒤에 감춰진 도발적인 매력, 때때로 드러나는 소년미까지. 키스 스탠필드는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 데스틴 크리튼 감독의 졸업 작품인 [Short Term 12]에 출연하면서 본격적으로 연기에 발을 내딛었다. 이후 그는 뮤직비디오, 드라마, 상업영화 등 장르를 넘나들며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겟아웃] [나이브스 아웃] 같은 국내 관객에게 친숙한 유명 작품에도 출연했으며, 2021년에는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로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조연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그런 그가 [헌티드 맨션]으로 2년 만에 국내 극장가를 찾아온다. 디즈니랜드의 어트랙션에서 영감을 받은 에디 머핀 주연의 동명 영화를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개비와 트래비스 모자가 유령 999명이 살고 있는 대저택에 이사를 오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리며, 키스 스탠필드는 투어 가이드 벤 역을 맡아 스토리의 중심축을 잡는다. 나쁜 남자, 순애보, 레지스탕스 등 극과 극을 달리는 역할도 맞춤복처럼 소화하는 키스 스탠필드. [헌티드 맨션]의 개봉을 맞아 그의 주요 작품 5편을 살펴보자.
마일스(2015) – 주니어 역

[마일스]는 전설적인 재즈 음악가 ‘마일스 데이비스’(돈 치들)의 숨겨진 미발표 앨범을 둘러싼 소동을 그린 영화다. 천재 뮤지션 마일스보다 무대 밖의 방탕아 마일스에 초점을 맞춘 것이 특징. 작중 총기 협박이 심심치 않게 등장하며, 격정적인 싸움이 벌어지는 와중에 감미로운 재즈 음악이 배경으로 깔리는 모순적인 연출도 특색이다.
키스 스탠필드는 마일스를 동경하는 루키 연주자 ‘주니어’를 연기했다. 그는 경쟁 프로듀서 ‘하퍼’의 협박에 마일스의 테이프를 훔치려다 걸리고, 이로 인해 위험한 갈등에 휘말리는 인물이다. 확고한 꿈을 가졌지만 불안정한 주변 환경 탓에 이리저리 휘둘리며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비운의 인물이기도 하다. 본작에서 스탠필드는 어리숙하고 앳된 모습을 보여준다. 큰 임팩트는 없지만, 이야기의 핵심이 테이프의 행방을 쫓기에 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할이다. 무엇보다 그는 영화 내내 메소드 연기를 펼친 돈 치들에게 묻히지 않고 본인의 연기를 보여주었다.
자체발광 제시카 제임스(2017) – 데이먼 역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자체발광 제시카 제임스]는 뉴욕에서 극작가로 일하는 ‘제시카’의 성장 스토리를 그린다. 이별 후 의욕 없이 지내던 제시카는 소개팅에서 ‘분’을 만나 천천히 마음을 키워나간다. 그 과정에서 제시카는 지난 사랑의 아픔을 지워내는 것은 물론, 꿈을 향해 당차게 전진한다. 극이 전개되면서 제시카는 더욱 성숙하고 독립적인 면모를 보여주며 커리어와 사랑을 쟁취한다.
한편 키스 스탠필드는 제시카의 전남친으로 출연한다. 누구나 인정하는 힙스터 훈남으로(심지어 분도 쿨하게 수긍한다), 제시카 역시 잊고 싶지만 그러지 못해 몰래 SNS 계정을 염탐할 정도다. 흔히 헤어지고 ‘내가 얘보다 더 멋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하고 후회하게 만드는 사람이랄까. 데이먼은 이따금씩 제시카의 꿈이나 망상을 통해 등장하면서 그가 제시카에게 얼마나 큰 부분을 차지했는지 암시한다. 꿈속 데이먼은 다시 만나달라며 구질구질하게 매달리는 전남친으로, 때로는 미련 없이 당당한 모습으로 나타나 제시카를 안달 나게 만든다. 키스 스탠필드의 분량은 많지 않지만, 그의 필모에 드문 정통 로맨틱 코미디이기에 그의 팬이라면 보기를 추천한다. 러닝타임 또한 83분이라 부담도 적다.
데스노트(2017) – L 역

동명의 일본 만화을 기반으로 한 스릴러 영화 [데스노트]는 미국의 고등학생 라이트 터너가 이름을 적기만 하면 그 사람을 죽이는 공책을 발견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공책의 초자연적 힘을 활용해 범죄자들을 숙청하기 시작하는 라이트. 그러나 라이트가 신의 힘을 탐미하는 사이, 한 탐정이 그가 흘린 단서를 포착해 추적해오기 시작한다.
키스 스탠필드는 라이트를 쫓는 천재 탐정 ‘L’을 연기했다. 냉철한 추리력과 치밀한 설계로 주인공을 궁지로 몰아넣는 인물이다. 숨어서 활동하는 라이트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 만큼 담대한 성격을 가졌다. 또한 착장은 올블랙에 자세는 구부정하고, 대외적인 일은 대리인을 통해 처리하는 신비주의자다. 연신 두뇌를 집중해서 쓰기 때문에 단 음식을 달고 사는 것이 반전 매력. 키스 스탠필드는 작중 표정 변화를 크게 보여주지 않다가, 말미에 극적인 변화로 강렬한 임팩트를 선사한다. 다만 배우들의 열연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반응은 썩 좋지 않았다. 그래도 키스 스탠필드는 만화에서 튀어나온 듯 어색하지 않게 캐릭터에 녹아 들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나이브스 아웃(2019) – 엘리엇 경위 역

탐정 브누아 블랑이 석연치 않은 죽음을 파헤치는 미스터리 영화 [나이브스 아웃]. 베스트셀러 작가 할란이 85세 생일 파티를 치른 다음 날 사망한 채로 발견되고 마침 절묘하게 브누아 블랑에게 해당 사건을 조사해 달라는 의뢰 편지가 도착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내 파티에 참석한 모든 사람을 조사하는 브누아 블랑. 점잖고 여유로운 할란의 가족들과 할란의 최측근이자 간호사인 마르타의 숨겨진 사정이 밝혀지면서 서스펜스가 고조된다.
키스 스탠필드는 탐정 브누아 블랑과 함께 사건을 조사하는 엘리엇 경위 역을 맡았다. 브누아 블랑이 괴짜같은 천재를 표방한다면, 엘리엇은 일반적인 형사를 대표하는 인물. 초기에 그는 할란의 죽음을 자살이라 주장하며 브누아 블랑과 대치점에 서는 듯하나, 유연한 사고와 베테랑 다운 대처를 선보이며 자문으로 초청된 브누아 블랑에게 힘을 실어준다. 본작에서 엘리엇은 다른 캐릭터들의 활약에 묻히는 감이 있지만, 키스 스탠필드 특유의 나른한 목소리를 한껏 들을 수 있는 작품이다.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2021) – 빌 오닐 역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는 절도범으로 체포된 윌리엄 오닐이 징역형을 면하기 위해 정치 스파이가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1968년 미국, 흑인 민권을 사수한다는 구호 하에 설립된 흑표당이 저돌적으로 세력을 넓혀가기 시작한다. 이에 FBI는 흑표당의 지부장 프레드 햄프턴을 위험 인물로 지목하고, 그를 감시할 목적으로 윌리엄을 조직에 잠입시킨다. 이내 윌리엄은 신뢰를 얻어 책임자의 자리까지 오르지만, 햄프턴과 가까워질수록 신념과 배신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
처음 윌리엄은 감옥행을 피하겠다는 개인적인 목적으로 입당했기 때문에 몸을 사린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흑표당은 FBI 국장이 ‘미국 안보의 가장 큰 위협’이라 부를만큼 기세가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윌리엄은 FBI 미쳴 요원의 압박과 회유에 당에 점점 더 깊게 관여한다. 그 결과 프레드 햄프턴의 심복이 되는데 성공하지만, 덩달아 양심의 가책도 심해졌다. 이처럼 윌리엄은 극중 가장 극적인 변화와 성장을 이루며, 그래서 가장 입체적인 캐릭터이기도 하다. 키스 스탠필드는 양자택일을 강요받는 인물의 갈등과 불안을 생생히 표현했고, 열연을 펼친 결과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조연상 후보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