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놀란의 신작 [오펜하이머]는 세계 최초의 핵무기 개발 계획인 맨하튼 프로젝트를 주도했던 오펜하이머의 인생을 담은 작품이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었던 시절, 지금의 혼란을 끝내기 위해 핵무기를 만들었던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오펜하이머와 주변 이들의 이야기를 시간과 장소를 오가며 치열하게 그린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그동안 [다크 나이트] 시리즈를 비롯한, 꿈에 관한 두뇌유희게임 [인셉션], 무한한 공간 저 너머로 천만 관객을 돌파한 [인터스텔라], 그리고 [테넷]까지 스튜디오의 모든 것을 건 대형 영화를 주로 만들었다. 하지만 놀란의 이름을 세계에 알린 것은 규모보다 서사의 힘이 강했던 [메멘토]다. 그래서일까? [오펜하이머]는 놀란이 선보인 블록버스터보다 오히려 이쪽에 가까운 작품이다.
인물 드라마도 놀란이 만들면 다르다. [메멘토], [덩케르크]에서 보여준 다층 플롯과 흑백 이미지의 교차는 한 편의 서스펜스 영화를 보는 기분이다. 주인공 오펜하이머가 핵무기를 개발하면서 겪는 고뇌도 섬세하게 담아낸다. 후반부 청문회와 법정을 오고 가는 설전은 그 자체로 스릴감이 넘친다. 편집 또한 일부러 속도감을 의식한 듯 휙휙 지나간다. 시놉만 보면 한 인물의 정적인 이야기 같지만, 실상은 범죄 스릴러 영화를 보는 듯한 긴장감이 러닝타임 내내 가득하다.

개봉전부터 기대를 모은 핵폭탄급 캐스팅은 영화의 힘을 보탠다. 놀란의 페르소나인 킬리언 머피는 오펜하이머 역을 맡아서 이야기를 완전히 장악한다. 그가 등장하지 않는 플롯이 없을 정도로 3시간 동안 킬리언 머피의 얼굴, 눈빛, 몸짓이 계속 잔상에 남는다. 캐릭터의 내면을 실제로 보는 듯한 그의 열연 덕분이다. 이 밖에 맷 데이먼, 에밀리 블런트, 플로렌스 뷰 등 네임드 배우들이 적재적소에 나와 인상적인 연기를 펼친다. 특히 벌써부터 오스카 트로피에 근접한 연기를 펼쳤다는 극중 오펜하이머와 대립하는 루이스 스토로스 역의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흑백 화면의 이미지 속에 생생한 색감이 느껴지는 연기를 펼친다.

냉정하게 말해 [오펜하이머]는 놀란의 다른 영화처럼 비주얼이 뛰어난 작품은 아니다. 하지만 아이맥스 화면을 가득히 메우는 오펜하이머의 인물 샷이나, 풍경 샷은 그 자체로 벅차다. CG 없이 직접 세트를 지어 터트렸다는 트리니티 실험 장면은 환상적이면서도 오싹하고, 현실감 넘치면서도 몽환적이다. 세계 최초 흑백 아이맥스 역시 기품 넘치면서도 당시의 긴박한 상황을 실제로 보는듯한 효과를 자아낸다.
전문적인 용어와 인물들이 많이 나와 자칫 헤맬 수 있다는 단점만 뺀다면, [오펜하이머]는 놀란의 명성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작품이다. 극중 맨하튼 프로젝트가 던진 파장이 이 영화의 개봉일인 광복절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점에서, [오펜하이머]는 한국팬들에게 더 특별하게 다가올 듯하다. 내년도 오스카 작품상을 수상해도 이견이 없을 듯한 영화를 벌써 만나는 만족감과 함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