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딴생각] 내가 잠깐 미쳤나봐

  • 빈상자
  • 2016-06-30 00:4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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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생각]에 빠지다

내가 잠깐, 미쳤나봐

 

**<왕좌의 게임> 시즌6, 10화까지의 스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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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killed them because it felt good to watch them burn. (내가 그들을 불살라 죽여버렸고,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

 

 

나도 모르게 세르세이를 응원했다

하늘 위로 커다랗게 솟아오르는 폭발이 (마저리와 함께) 하이스패로우를 삼켜버리는 순간, 내 심정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솔직히 난,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 순간을 기다려왔다. 세르세이(라고 쓰고 ‘써씨’라고 읽자)가 머리카락을 잘리고 벌거벗긴 채 거리로 내몰려 군중들 사이로 치욕스런 걸음을 해야만 했던 건, 현재 권좌에 앉아있는 왕의 어머니로서는 물론 여자로서도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다. 하이스패로우에 대한 복수는 그런 치욕스런 일을 감당해야만 했던 세르세이에 대한 최소한의 보상이고 시청자로서도 기다리던 바였다. 그런데 난 도대체 언제부터 세르세이에 이입되기 시작했던 걸까?    

 

하이스패로우가 부상하기 전까지는, 킹스랜딩에서 세르세이에게 대적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초기 최고의 악인 조프리조차 자신의 어머니인 세르세이는 완전히 거역할 수는 없었다. 세르세이는 오즈의 마법사의 나쁜 서쪽 마녀와도 같았고, 양녀에게 독이 든 사과를 건내는 왕비이기도 했다. 남편인 왕을 죽였고 브랜의 불행에도 일조했으며 산사에게도 잔혹했다. 자기 자식만 끔찍이 아끼는 전형적인 비뚤어진 어머니상이었고 권력욕도 커서, 결국에는 프레이가와 작당하여 스타크 가문의 중요 인물들을 몰살시킨 장본인이었다. 조프리의 전과 후에도 늘 변함없었고 지속적으로 살아남았던, 가장 오래되고 대표적인 악인이었다. 적어도 하이스패로우가 부상하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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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생각을 하고 있던 거지?

하이스패로우가 부상하면서 세르세이는 서서히 불쌍해지기 시작했다. 주변 사람들에 대한 통제력을 조금씩 읽기 시작하더니 하이스패로우에 의해 투옥되어 처음으로 비참하고 비천한 밑바닥 삶을 겪다가 최고의 모멸까지 당했다. 결국엔 마지막으로 남은 자식 토멘까지 어머니에게 등을 돌렸고 최후의 심판만 남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시청자들은 천천히 세르세이를 동정하기 시작했고 결국 그녀가 빼앗긴 권력에 우리가 분하고 벌거벗은 그녀를 대신하여 우리가 모멸감을 느끼게 되었다.

 

갑이었고 가해자였던 세르세이가 을이 되고 피해자처럼 변모하는 듯 했지만, 사실 그녀에 관해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달라진 게 없었다. 그 전에 했던 그녀의 행위는 되돌릴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그녀가 과거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의 상황이 달라졌을 뿐 그녀의 천성이 변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더 이상 과거의 일들이나 그녀가 조금도 (선한 쪽으로) 변하지 않았다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미 세르세이를 동정하기 시작했다. '불쌍하잖아.'

 

하지만 하이스패로우가 날라가는 장면에 통쾌함을 느끼는 것도 잠시, 세르세이가 죽은 아들을 대신하여 왕좌에 앉는 순간에야 우리는 깨닳았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도대체 우리가 뭔 생각을 하고 있던 거지?’

 

이젠 왕인 남편이나 아들의 뒤에 설 필요도 없이 명실상부한 최고의 권력자가 된 세르세이가 최고의 악인, 악녀, 빌런으로 돌아올 것이 뻔해 보인다. 우리가 잠시 얇팍한 동정심에 휘말려 세르세이를 (은근히 혹은 적극적으로) 응원하는 동안 그녀는 차근히 권력 중심으로의 복귀를 준비했었고 결국 이뤄내고 말았다. 처음에 우리가 두려워했고 악했던 그녀보다 더 독한 마음을 품고 훨씬 더 강력한 힘을 갖게 된 세르세이로 돌아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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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things we do for love."

 

 

이성과 감정

<왕좌의 게임>이 캐릭터에 대한 시청자의 마음을 가지고 장난친 것은 세르세이가 처음이나 마지막은 아니다. 지금은 호감 캐릭터가 된 제이미가 예전에 브랜을 떠밀은 당사자라는 사실은 아득하기만 하다. 하지만 사랑을 위해서는 뭐든지 할 수 있다며 브랜을 밀었던 제이미는, 최근 에드무어 툴리를 대적하며 다시 한 번 그 말을 상기시켜주었다. 이제는 우리 편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제이미이지만, 세르세이를 사랑하는 그가 앞으로 사랑을 위해서 또 다시 어떤 일까지 하게 될지는 모를 일이다. 그리고 그때 제이미에 대한 우리의 감정이 다시 뒤집혀지지 말라는 법도 없다. 

 

지금은 어느 정도 성향이 파악된 리틀핑거와 배리스도 초기에는 ‘우리 편’인지 아닌 지를 가늠할 수가 없어서 시청자들이 우왕좌왕하면서 마음이 오갔다. 시시콜콜 잔소리에 거만하기까지한 할머니 올레나는 물론 죄없는 제이미의 딸 마이셀라를 독살하고 도란의 왕 마르텔을 죽이고 쿠데타를 일으킨 샌드 스네이크 무리에게까지도, 이들이 세르세이에 대적하는 공개 선언을 하는 순간 급속히 친근감을 느끼게 되는, <왕좌의 게임>은 그렇게 묘한 감정 전복의 연속이다. 

 

책과 드라마 작가들의 의도에 따라 마음대로 휘둘리는 시청자들의 감정을 보면서, 작가들이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인간의 마음이 간사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만일 사람들의 감정이 이토록 변덕스럽고 대중의 이성이 이토록 허약하고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몇 명의 작가들이 그렇게 마음대로 움직이고 가지고 놀 수 있다고 한다면, 정치와 언론에겐 더욱더 쉬운 일일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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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인이 등장하는 영화나 드라마도 다들 비슷하지 싶어요. 오즈나 덱스터... 그들에게 은근 동화되죠.
하우스 오브 카드에서 "클레어 언더우드"의 배신을 두고 이해를 못하겠단 반응이 있었던 것도... 프랭크나 클레어 모두 원래 자기 욕심대로 움직이는 악인이란 걸 잠시 잊은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