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 찰칵의 그 순간

영화로 찍어보는 사진놀이

 

by. 빈상자

 

종종 영화를 보다가 영화의 어느 한 장면이 유난히 오래 기억에 남을 때가 있다. 그 순간 영화는 120분 동안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영상이 아니라 단 한 장의 사진으로 기억된다. 이는 영화가 수많은 스틸 사진의 나열인 것을 생각하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관객은 그렇게 수많은 사진의 퍼레이드 속에서 각자의 기준과 경험에 따라 서로 다른 단 하나의 이미지를 선택해 기억한다.

 

* 주의: <엘르>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미지: 소니 픽쳐스>

 

지난해 칸느영화제에서 공개된 폴 버호벤의 <엘르>는 비평가들에겐 찬사와 비판을 동시에 받으며, 관객들에겐 혼동과 고민거리를 남겼다. 폭력적이고도 과감하기도 한 폴 버호벤의 수사법을 가진 영화는 편한 자세나 수동적인 마음만으로는 접근이 쉽지 않다. 깊게 상처받은 과거를 갖고 있는 연약한 여자인 동시에 웬만한 남성보다도 강하기도 한 여성인 미셸은 흔지 않은 캐릭터, 흔지 않은 여성으로, ‘그녀(elle)’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다 보면 웬만한 건 태연하고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런 <엘르>를 바라보며 남은 몇 장의 사진들을 골라와 봤다.

 

 

1. 콩가루 집안을 소개합니다

<이미지: 소니 픽쳐스>

 

카메라를 정면으로 향하며 가장 밝게 빛나는 미셸의 얼굴은, 이 한 장면만 봐도 그녀가 이 영화의 주인공인 것을 누구라도 단번에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 장면은 크리스마스가 되어 미셸의 집으로 초대된 그녀의 가족과 주변 인물들, 그러니까 영화의 주요 등장인물들이 다 모인 순간이다. 미셸을 중심으로 마치 최후의 만찬을 즐기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하지만 미셸은 신성한 존재도 아니고 이들 사이에서 지도자와 같은 위치도 아니다. 주변 사람들이 존경하고 따르기는커녕, 저 식탁에 모인 대부분의 인물들과 갈등을 겪고 있다. 좌로는 자신의 성폭행범, 우로는 절친의 남편이기도 한 불륜 상대남. 마주 보는 건너편에는 전남편과 그 옆에 ‘여시’ 같은 전남편의 젊은 애인. 그리고 오른쪽 끝에는 웬수가 따로 없는 엄마와 창부, 맞은편 왼쪽 끝에는 장가가더니 아내밖에 모르는 철없는 아들과 서양에도 고부간의 갈등이 있음을 증명하는 며느리까지, 미셸의 문제적 인간관계 종합세트다. 이렇게 모두 모여 앉아 있으니 즐거워야 할 크리스마스 저녁이 굉장히 어색해지는 그런 밤이다.

 

2. 할퀴기라도 했어야지

<이미지: 소니 픽쳐스>

 

영화의 첫 장면은 미셸의 고양이 원샷. 개인적으로 집사는 꿈의 직업이기에 일단 심쿵. 하지만 이때의 사운드는 심히 불편한 것이었기에, 금방 정신을 차리고 다시 보면 뭔가 서늘한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나중에 미셸이 성폭행을 회상하는 장면에서 똑같은 샷이 다시 한번 쓰인다. 모든 것을 목격하면서도 고개도 돌리지 않고 무심한 듯 바라보는 태연한 고양이의 태도가 어쩐지 앞으로 전개될 미셸의 태도와 닮아있다. “할퀴기라도 했어야지”라고 미셸이 심문도 하지만, 냥이가 뭘 알겠나. 그나저나 냥이는 그렇다 치고, 미셸은 왜 그랬을까? 도대체 왜 그렇게 의연했을까?

 

3. 홀리데이 롤이 뭐죠?

<이미지: 소니 픽쳐스>

 

“홀리데이 롤이 뭐예요?” “네, 고객님. 홀리데이 롤은 토티야 위에 피망, 양파 등을 치즈와 함께 넣어 싼 말이입니다.” 성폭행을 당한 직후 차분하게 스시를 주문하는 미셸의 모습이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평온하게 음식을 주문하는 모습도 모습이지만, 왜 하필 스시인 거지? 특히 스시가 ‘날(raw) 것’의 음식으로서 일부 서양인들에겐 여전히 기괴한 느낌으로 남아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 그렇다. 아마 우리나라 영화라면 낙지라도 씹었을 것 같은 분위기다. 그 어느 때보다 태연하게.

 

4. 바람부는 날에는…

<이미지: 소니 픽쳐스>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다. 돌풍 같은 바람에 나무 외문이 큰 소리를 내며 요동친다. 이렇게 음산한 날에는 거울 하나도 평범하게 보이지 않는다. 아마 저 거울은 하얀 벽을 비우지 않고 채우기 위함이었을 수도 있고, 공간의 깊이감을 늘여주기 위한 것일 수도 있고, 혹은 현장에 있던 것을 미술팀이 귀찮아서 치우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아, 물론 마지막 가설의 가능성은 거의 제로이지만. 무슨 일이 닥칠 것은 상황. 이때 도착하는 것은 도움의 손길일까, 아니면 폭력의 손길일까.

 

5. 저스트 원 미닛

<이미지: 소니 픽쳐스>

 

영화가 여기까지 썰을 풀었을 때, 미셸은 맞은편에 앉아있는 패트릭이 자신을 성폭행한 침입자라는 것을 알고 있는 때이다. 마트에서 우연히 만난 패트릭의 초대에 응해 아들과 함께 패트릭의 집을 방문한 미셸이 패트릭 앞에서 다리를 올리고 도발적인 자세로 앉아있다. 비록 남의 집이지만, 그 유명하고 비싸다는 찰스와 레이 임스 부부의 라운지 의자 위에 주인처럼 앉아서 분위기를 주도하는 미셸의 태도엔 여유가 넘친다. 내 것이 되는 데 필요한 시간, 저스트 원 미닛.

 

6. 문이 닫히고

<이미지: 소니 픽쳐스>

 

“이건 좀 치사하잖아” 의식 없이 죽어가고 있는 엄마가 술수라도 쓰고 있다는 듯 악에 받혀 불평을 늘어놓던 미셸. 심장 모니터의 소리가 짧고 높아지면서 곧 밀려든 간호사들에게 미셸은 쫓겨나듯 나가고 그런 미셸 앞으로 문이 서서히 닫힌다. 엄마와 화해할 기회가 그렇게 영원히 닫혔다는 것을 미셸은 언제쯤 깨달았을까.

 

7. 남자들 속에서

<이미지: 소니 픽쳐스>

 

뭔가 남자들에게 전방위로 포위된 듯한 미셸. 화면에선 보이지 않는 왼쪽엔 어머니의 어린 창부도 있다. 어머니의 유해를 뿌리러 간 자리에서 미셸과 아들 뱅상과의 갈등은 극으로 달한다. 결국 우리 같으면 절대 상상조차 하기 힘든 심한 말을 어머니에게 하고 마는 아들. 존속 명예회손, 뭐 이런 가중처벌은 없는 건가. 전남편에 불륜남에 아들까지, 미셸은 주변의 남자들에 갇히고 묶이고 이용당하기도 하지만, 또 그만큼 그들을 이용하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통제하려 하기도 한다.

 

8. 편히 쉴 수 있을까

<이미지: 소니 픽쳐스>

 

뭔가 유적지 같은 프랑스의 납골당. 근소한 시간 차를 두고 미셸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두 잃었다. 하지만 그녀가 굉장한 슬픔에 빠져있다고 상상하기는 어렵다. 아버지 하고도 어머니 하고도 사이가 좋지 않았던 미셸이 두 분의 납골당 앞에 서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는 알 길이 없다. 몇 가지 확실한 것은 그녀가 그래도 이곳까지 왔다는 것, 꽃도 가져왔다는 것, 그러나 아주 짧은 시간 동안만 머물렀다는 것, 그리고 부모에게 어떠한 말이나 눈물도 돌려주지 않았다는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