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테일러콘텐츠 랩 ‘봉준호 감독 읽기’의 랩장 Jason Bechervaise 교수의 한양대 박사 학위 논문 ‘Bong Joon-ho and the Korean Film Industry: The National and Transnational Cinema Intersection'(2017.02) 중 일부를 승인 하에 번역한 글입니다. (랩 상세 안내는 ☞여기☜를 클릭해주세요)

이미지: CJ 엔터테인먼트

[살인의 추억]에서 가장 강렬했던 장면은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기 전 박두만(송강호 분)이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시퀀스다. 극중 현재 시점에서 영업사원으로 일하고 있지만, 박두만은 1980년대에 한국에서 가장 악명 높고 오늘날까지도 정체를 밝히지 못한 연쇄 살인마를 뒤쫓던 형사였다.

박두만의 실패를 온전히 그의 책임이라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역동적이고 급진적이었던 한국 현대사에 내재된 복잡한 요인들에 영향을 받았다는 해석이 더 적절하다. 독재 정권 아래서 그는 ‘수사’가 아닌 ‘탄압’을 배웠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면, 세월이 흐른 뒤 형사 시절 첫 시신을 발견했던 장소에 들른 두만은 한 소녀로부터 “얼마 전에도 어떤 아저씨가 옛날에 한 일이 생각나서 찾아왔다고 하더라”라는 말을 듣는다. 카메라를 응시하는 두만의 눈빛은 살인마가 여전히 이 사회 어딘가에 숨어있다는 깨달음에서 비롯된 고통으로 가득하다.

이 장면은 ‘살인’과 ‘추억’이라는 두 단어와 두려움에 떠는 두만의 모습을 통해 여성이 강간과 살해를 당했던 80년대를 돌아보게 한다. 80년대를 ‘폭력의 시대’라 칭한 봉준호의 말마따나 당시 한국은 정치·사회적 반대를 억누르기 위해 증거 조작과 폭력, 규정 무시가 만연했던 전두환 독재 아래에 있었고, 이러한 사회적 특성이 [살인의 추억]에 녹아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봉준호는 이런 소재의 영화라면 흔히 택했을 ‘가슴 아픈 결말’로 [살인의 추억]을 마무리 짓지 않았다. 그는 [플란다스의 개]와 마찬가지로 [살인의 추억]에서도 한국의 현대사를 바라볼 때 일반적인 시선을 한 번 더 꼬는 방식을 택했다. 두 작품의 차이를 꼽자면 [플란다스의 개]가 평단과 대중으로부터 미적지근한 평가를 받은 반면, [살인의 추억]은 그렇지 않았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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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4월 25일 국내 개봉한 [살인의 추억]은 평단과 관객의 열광적인 호평에 힘입어 500만 관객 이상을 동원한 흥행작으로 자리매김했다. 영화가 완성되기 전부터 각본의 수준이 완벽에 가깝다던 업계 관계자들의 평가는 폭발적인 흥행에 큰 힘이 되어주기도 했다.

이때부터 ‘웰메이드(well-made의 음역)’는 한국영화 기자와 평론가들이 [살인의 추억]과 같은 명작을 칭할 때 유행어처럼 사용되었다. 씨네 21의 김소희는 이 작품을 “규정된 장르와 스타 시스템을 이용한 상업 영화지만, 그 안에는 독특한 스타일과 사회적 이슈에 대한 견해가 담겨있다”라 평한 바 있다.

[살인의 추억]은 개봉 후 15년 동안 수많은 평론가들에게 최고의 한국 영화로 꼽히며 칭송받은 명작 중 하나다. 지난 2014년, 한국을 대표하는 영화 전문가들이 선정한 ‘한국영화 100선’에 유일하게 10위 안에 든 2000년대 이후 작품이기도 하다. 당시 [살인의 추억]은 [바람 불어 좋은 날](1980),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와 더불어 7위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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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감독의 2003년작은 한국영화의 스펙트럼이 넓다는 것을 증명하고 국제적 입지를 다지는 데에도 기여했다. 2003년은 [살인의 추억]을 비롯한 여러 ‘웰메이드’ 영화들이 연달아 개봉해 한국 영화 역사에서 상당히 중요한 시기로 기록된다. 박찬욱의 [올드보이], 김지운의 [장화, 홍련], 임상수의 [바람난 가족], 그리고 장준환의 [지구를 지켜라!]와 [살인의 추억]이 같은 해 공개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당시 [지구를 지켜라!]를 제외하고는 전부 한국 박스오피스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는데, 사실 본격적으로 한국영화가 세계 무대에서 빛을 본 것은 [올드보이]가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던 2004년이었다. [지구를 지켜라!]와 [살인의 추억], 그리고 [장화, 홍련] 역시 전 세계 평론가들과 프로그래머, 그리고 관객들이 영화 그 자체보다는 이러한 작품들을 탄생시킨 한국에 주목하게 만들었다.

한국영화에 대한 세계적인 관심이 급격하게 증가한 이유가 이들이 할리우드나 유럽의 작품과 달랐기 때문임을 부정할 수 없다. 이 작품들이 할리우드의 특징을 일정 부분 따르는 동시에 거부하기도 하면서 지극히 ‘한국적인’ 색을 뗬기 때문이다. 예로, [올드보이]는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은연중에 드러낸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오대수(최민식)가 15년 간 감금당했다가 어느 날 갑자기 풀려나는 모습은 독재 정권 이후 민주주의 체제로의 급진적인 변화를 겪은 한국 현대사의 흐름과 흡사하다. 한편 [올드보이]의 속도감이나 주인공과 적수를 나누는 이분법적인 시선, 그리고 진실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는 내용은 전형적인 스릴러 장르의 요소들을 따르면서도, 박찬욱 감독만의 ‘과도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표현주의적 연출에 힘입어 상업 영화보다는 예술 영화에 가까운 색채를 띤다.

이러한 관점에서 [살인의 추억]은 [올드보이]와 닮은 부분이 많다. 두 작품의 유사성은 봉준호가 국가적과 초국가적인 시네마가 수렴하는 지점을 찾고, 할리우드의 전형적인 서사와 스타일을 따르지 않으면서도 국내외 관객을 만족시키는 작품을 연출한 방법을 묻는 질문의 답이기도 하다. 당연한 말이지만, 할리우드를 비롯한 전 세계 영화계에 봉준호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그가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은 비단 이 작품뿐만 아니라 그의 필모그래피 전체를 매력적으로 만든다. 미국의 자본주의 시스템을 블랙 코미디의 시선으로 분석한 [파고]의 시선과 상당히 흡사하다. 봉준호가 [살인의 추억]을 통해 한국 역사를 묘사한 방식이 극적으로 차별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가 장르를 비트는 방식만큼은 근본적으로 독특하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