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사이에 날씨가 부쩍 추워졌다. 퇴근 후나 주말은 침대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는 게 최고의 낙이지만, 사람의 욕심이란 게 몸은 편하면서도 정신은 자극적인 무언가를 원하게 된다(나만 그런가?).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데엔 또 공포영화만한 것이 없다. ‘공포영화=여름’이라는 공식이 대세지만, 한 겨울에 먹는 아이스크림이 그렇게 맛있듯이 추울 때 보는 공포영화에도 색다른 매력이 있다. 이번 주말에는 털이 쭈뼛 서는 공포영화 한 편 어떨까? ‘이불을 덮고 에어컨을 켜는 사치’를 누리는 기분이 들 테니까.

소름(Creep, 2014/2017)

이미지: 넷플릭스

1편 – 로튼토마토 89% | 메타크리틱 74 | IMDB: 6.3
2편 – 로튼토마토 100% | 메타크리틱 75 | IMDB: 6.4

에디터 영준 ★★★★ 귀신보다 사람이 무섭더라

#호러 컨셉 인터넷에 올라온 고수익 아르바이트에 지원한 주인공. 하루 동안 의뢰인의 일거수일투족을 촬영만 하면 1,000달러를 벌 수 있다는 사실에 기쁜 마음으로 문자로 받은 주소지로 향한다. 처음에는 ‘조금 독특한’ 의뢰인의 일상을 촬영하는 듯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가 수상쩍어 보이기 시작한다. 거짓말은 기본, 이상 행동까지 보이며 주인공을 불안하게 만드는 그가 촬영을 부탁한 진짜 목적은 무엇일까.

#무섭다 vs 무섭지 않다 점프 스케어가 대세인 최근 공포영화를 즐겨보는 관객에게는 조금 심심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서서히 공포와 긴장감을 끌어올리는 흐름의 작품을 선호하거나 ‘귀신보다 사람이 무섭다’를 믿는 이들이라면 [소름] 시리즈가 취향을 제대로 저격한다. 특히 주인공의 의심과 불안이 극에 달하는 영화 중후반부터는 캠코더 화면 밖으로 의뢰인이 사라지면 침을 꼴깍 삼키고 괜히 눈을 가리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볼만하다 vs 시간낭비다 저예산 영화라고는 믿기지 않는 퀄리티를 가진 작품들이다. 절정에 도달하는 과정과 두 배우의 퍼포먼스가 워낙 탄탄해 몰입감이 상당하다. 솔직히 전작이 워낙 흥미진진해서 ‘속편은 재미없으면 어쩌지’라고 걱정했는데, 2편도 정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봤다(오히려 2편 평가가 더 좋다). 두 작품의 러닝타임을 다 합쳐도 두 시간 반이 조금 넘고, 속편이 전작 내용에서 그대로 이어져 몰아서 보기도 부담이 없다. 넷플릭스로 직행한 공포영화에 대한 선입견이 좋지 않은 이들이 제법 있는 걸로 아는데, [소름] 시리즈가 그 편견을 싹 날려줄 것이다.

#이건 어때? [쿼런틴] & [블레어 위치](2016): [소름]이 ‘인간에게서 느끼는 공포’라는 현실적인 소재를 그린 것과 달리 [쿼런틴]과 [블레어 위치]는 좀비와 악령을 다루지만, 같은 파운트 풋티지 장르이기에 추천한다. [할로윈] & [븐] & [한니발]: 대표적인 ‘사이코패스 영화’들이다. 내용 스포일러를 최대한 하지 않으려 했는데, 영화 추천하면서 본의 아니게 스포일러를 해버렸다.

제럴드의 게임(Gerald’s Game, 2017)

이미지: 넷플릭스

로튼토마토 91% | 메타크리틱 77 | IMDB: 6.6

에디터 원희 ★★★ 긴장을 놓을 수 없는 3인극 같은 2인극

#호러 컨셉 제시와 제럴드 부부가 어느 외딴 별장으로 휴가를 떠난다. 겉으로는 화목한 듯 보이지만 부부생활에 문제가 있는 두 사람은 색다른 경험을 하기로 하는데, 제럴드가 수갑을 사용해 제시를 침대에 묶어두고 강압적인 관계를 가지려 하자 제시가 이를 거부한다. 제럴드는 수갑을 풀어주길 거부하고, 관계를 이어나가려는 도중에 심장마비로 쓰러져 사망하고 만다. 인적 드문 곳, 문 열린 집의 침대 위에 갇히고 만 제시는 긴박해지는 상황 속에서 점점 환영을 보게 된다.

#무섭다 vs 무섭지 않다 여느 호러 영화와는 달리 [제럴드의 게임]에는 귀신도 괴물도 없다. 우연히 벌어진 일 때문에 극한 상황에 몰리는 주인공의 심리 변화를 심도 있게 그려낸 심리 스릴러인데, 무섭지 않다고 해서 마냥 긴장감을 놓을 수는 없다. 천천히 움직이며 시선을 집중시키는 카메라 구도와 정적을 효과적으로 사용해 아무도 없는 공간에 갇힌 상황을 극대화해 절로 손에 땀을 쥐게 만든다. 은근(?) 잔인한 장면과 그 와중에 깜짝 놀랄 만한 장면이 등장하니 주의하자.

#볼만하다 vs 시간낭비다 그럼에도 볼만한 호러 영화라고 추천하는 이유는 제시의 서사와 제시를 연기하는 칼라 구지노의 연기 때문이다. 현실인지 환상인지 분간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제럴드의 환영과 또 다른 자신의 환영이 등장해 제시를 심리적으로 압박하는데, 공간의 변동이 거의 없음에도 오로지 연기로 힘있게 작품을 이끌어간다. 침대에서 탈출하는 과정에서 과거에 겪었던 끔찍한 일에서부터 남편 제럴드까지 이어져 온 자신의 상처를 마주하며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건 어때? 이 영화와 비슷하게, 한 사람의 심리가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공포 스릴러 [샤이닝]을 추천하고 싶다.

캠 걸스(Cam, 2018)

이미지: 넷플릭스

로튼토마토 93% | 메타크리틱 71 | IMDB: 5.9

에디터 현정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호러 컨셉 성인방송 BJ 앨리스는 나름의 규칙을 지키며 인기에 집착하는 야심 찬 여성이다. 경쟁자들처럼 노골적으로 성을 전시하는 대신, 가짜 자살쇼를 연출하는 충격적인 방식으로 순위를 끌어올리는 데 집착한다. 그런데 처음으로 규칙을 깨트린 다음 날 자신과 꼭 닮은 사람에게 계정을 해킹당하고 점차 사생활까지 그 여파가 미친다. 디지털 도플갱어는 대체 누구일까?

#무섭다 vs 무섭지 않다 [캠 걸스]는 공포보다 미스터리 스릴러에 가깝다. 무섭다고 느낄 만한 장면은 없지만, 앨리스란 인물의 뒤틀린 욕망을 과감하게 드러내는 오프닝과 후반부 하이라이트는 확실히 섬뜩하고 무시무시하다. [핸드메이즈 테일]에서 애꾸눈 재닌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 매들린 브루어는 [캠 걸스]에서도 그에 못지않은 강박적인 모습으로 어두운 활기를 불어넣는다.

#볼만하다 vs 시간낭비다 [캠 걸스]는 21세기의 어두운 단면을 담아낸 섬뜩한 동화 같은 영화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섹스산업을 현대 문명에서 가장 미래지향적이며 온갖 욕망이 충돌하는 소셜미디어로 옮겨와 기괴한 이야기를 선보인다. 성인방송 BJ란 배경을 걷어내면 앨리스가 겪는 위기는 디지털 일상을 탐닉하는 누구에게나 해당할 수 있는 이야기다. 어떤 면에선 [언프렌디드] 시리즈와 [서치]의 노골적으로 극단적인 버전이라 할 수 있겠다. 앨리스에게 직접적인 해를 가하는 정체는 끝까지 등장하진 않지만, 충격적인 자살쇼를 펼치는 오프닝부터 영화 전반 기괴하고 초현실적인 분위기로 음습한 긴장감을 자아낸다. 웹캠 성인방송이란 소재는 자칫 거부감을 줄 수 있으나 다행히 성 상품화의 전략은 취하지 않는다. 독특하고 낯선 시도를 하고 싶다면 러닝타임이 길지 않으니 도전해 볼만하다.

#이건 어때? 사실 [캠 걸스]는 앨리스가 왜 그토록 남성들의 눈먼 변태적인 욕망을 성공의 발판으로 삼으려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가상의 세계에서 쉽게 돈을 벌 수 있다는 유혹이 강력한 동기겠지만, 앨리스의 마지막 선택은 그래도 당혹스럽다. 하지만 현실은 더 혼란스럽고 불가해한 일들이 많다. 그런 점에서 시청률을 위해 범죄를 조작했다는 의혹을 받은 방송인 왈라시 소자를 다룬 다큐 시리즈 [시청률 살인]을 소개한다. 두 작품에서 주인공은 사람들을 현혹하는 가장 말초적인 소재 섹스와 살인을 이용한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한편, [캠 걸스]의 독특한 분위기는 사악하고 변칙적인 재미가 있는 [퍼펙션]을 떠올리는 데, 두 작품의 주인공들은 정형화된 여성 캐릭터에서 벗어난다.

사탄이 두려워한 대장장이(The Devil and the Blacksmith, 2017)

이미지: 넷플릭스

로튼토마토 78% | 메타크리틱 없음 | IMDB: 6.4

에디터 혜란 ★★☆ 민담의 재해석이 돋보이는 잔혹동화

#호러 컨셉 1800년대가 배경인 다크 판타지 호러로, 유럽의 민담 ‘대장장이와 악마’를 모티브로 했다. 바스크 지방의 한 작은 마을, 부모를 잃은 아이 ‘우수에’가 우연한 계기로 ‘은둔한 미치광이’ 대장장이가 악마를 가두고 고문한 걸 알게 된다. 한편, 내전 때 사라진 반란군의 금을 찾기 위해 마을에 공무원이 나타나고, 대장장이를 두려워한 마을 사람들은 ‘나라의 명령’을 핑계 삼아 대장장이를 해치려 한다.

#무섭다 vs 무섭지 않다 심장을 조이는 긴장감, 섬뜩한 느낌, 점프스캐어 같은 걸 선호한다면 이 영화는 ‘공포’ 근처에도 못 간다. 다크 호러 판타지라고 설명하지만 정확히는 ‘잔혹동화’ 스타일이다. 에디터는 공포영화 못 보기로 유명한 새가슴이지만, 이건 눈도 깜짝하지 않고 볼 수 있었다.

#볼만하다 vs 시간낭비다 무섭지 않다면서도 추천하는 이유는 영화 속 인물들의 슬픔과 절박함에 마음이 가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자살 때문에 마을의 천덕꾸러기가 된 ‘우수에’의 고생스러운 삶도 그렇고, 악마와 계약해 죽다 살아났는데 아내의 배신을 알고 폭주한 대장장이의 삶에도 동정심이 생긴다. 악마의 재해석도 마음에 든다. 악마는 엄청난 악의 화신이 아니라 번지르르한 말로 사람들을 꼬드기는 사기꾼에 가깝다. 오히려 지옥에서 온 자들의 말에 넘어가 대장장이를 공격하는 마을 사람들과 본인의 명성을 위해 어린아이를 핍박하는 선교자가 더 악마 같았다.

#이건 어때? 다크 판타지 장르라면 명작 [판의 미로: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를 빼놓을 수 없다. 억압적인 문화에서 핍박받는 어린 소녀가 주인공이고 전설의 존재가 등장한다는 점 때문에 처음엔 비슷하게 보여도, 내용 자체는 많이 다르다. 좀더 적극적으로 마법과 괴물이 있는 판타지에 뛰어드는 인물이 등장하는 [아이 킬 자이언트]도 권한다.

일라이(Eli, 2019)

이미지: 넷플릭스

로튼토마토 48% | 메타크리틱 없음 | IMDB: 5.8

에디터 홍선 ★★★ 후반 20분, ‘공포’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이 ‘충격’이 된다

#호러 컨셉 어렸을 때부터 희귀병을 앓는 일라이는 부모와 함께 외딴곳에 있는 치료시설에 도착한다. 이 곳의 책임자 이사벨라 박사는 일라이의 병이 나을 수 있게 정성을 다해 치료하겠다고 말한다. 희망을 가진 일라이는 치료시설에서 휴식을 취하지만 그 날부터 자꾸만 이상한 일들이 일어난다. 게다가 박사의 장담과는 반대로 치료를 할수록 일라이는 더욱 아프다. 그러던 어느 날 창 밖에 낯선 여자 아이 헤일리가 나타나 “이 곳의 치료를 믿지마”라는 의미 심장한 말을 건넨다.

#무섭다 vs 무섭지 않다 [일라이]는 치료시설에 도착한 이후부터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자 두려움을 느낀다. 한 번씩 터져주는 깜짝 효과는 가슴을 철렁하게도 한다. 그런데 이 뿐이다. 분위기는 으스스하지만 영화의 시선은 ‘숨겨진 무엇’에 더 주목한다. 무서운 장면이 나올까 봐 두 눈을 가리기보다, 다음 장면에서 어떤 비밀을 밝혀질지 궁금해 두 눈을 더 부릅뜨고 보게 할 정도. 공포영화로는 싱겁지만, 미스터리 스릴러로는 나쁘지 않다.

#볼만하다 vs 시간낭비다 [일라이]는 이야기 내내 비밀이 숨겨 있어 언젠가 터질 것 같은 분위기다. 그래서 영화의 어떤 장면도 허투루 넘길 수 없다. 그런 장면들이 모여 감춰진 비밀을 열게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세심한 연출로 오싹한 분위기도 만든다. 일라이의 비명이 계속되는 수술실은 끔찍하고, 유리와 거울을 이용한 공포 효과는 무섭다. 여기까지도 괜찮지만 [일라이]의 진정한 매력은 후반부에 있다. 흩어졌던 단서들이 하나로 모여 새로운 이야기를 만든다. 취향에 따라서는 뜬금없는 전개로 허탈할 수 있지만, 평범한 하우스 호러라고 생각했던 관객들의 고정관념을 화끈하게 비튼다.

#이건 어때? 영화 보는 내내 최근 극장에서 봤던 [더 보이]가 생각났다. 두 영화는 비슷한 점이 많다. 확실히 밝혀지지 않은 병 또는 힘을 가진 주인공과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어른들을 대치해, 공포영화의 공식으로 이야기를 이어간다. 특히 결말 부분에서 기존의 공식을 비트는 부분도(구체적으로 말하기에는 결정적인 스포일러라서 여기까지만) 닮아 같이 보면 묘한 데자뷰를 느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