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한 편이 탄생하기까지 짧게는 몇 년, 길게는 수십년이 걸린다. 수많은 의사결정을 거친 이후에나 본격적인 제작에 들어가게 되는데, 복잡한 절차를 통해 결정된 사안이 아닌 개봉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머리를 스친 아이디어가 운명을 좌우하는 경우도 제법 많다. 영화를 살리거나 망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최후의 선택’과 마주했던 작품들을 소개한다.

수퍼 소닉 (Sonic the Hedgehog)

이미지: 롯데엔터테인먼트

오랜 사랑을 받아온 게임 시리즈 ‘소닉’의 영화화 소식에 팬들은 기대 반, 걱정 반의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유출된 이미지와 공개된 예고편에 그나마 있던 기대도 사라지고 말았는데, 바로 소닉의 외모 때문이었다. 원작자까지 혀를 내두를 충격적인 비주얼이었던 만큼 팬들의 원성도 상당했고, 결국 파라마운트는 개봉일(기존 2019.11.08)을 미루며 디자인 수정을 결정한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지난 2월 개봉한 [수퍼 소닉]은 북미 게임 원작 영화 흥행 기록을 전부 새로이 쓰며 성공가도를 누구보다 빠르게 달리고 있는 중이니 말이다.

토이 스토리 (Toy Story)

이미지: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토이 스토리] 시리즈의 주인공 중 하나인 우디의 초창기 설정은 우리가 아는 ‘착하고 리더십 강한 모습’과 거리가 멀었다. 그는 항상 화가 난 성격파탄 독재자였는데, 기획 당시에는 버즈를 고의적으로 창문 밖으로 내던진 뒤 다른 장난감들에 의해 처단(?)당하는 운명이었다. [토이 스토리]를 ‘성인 취향의 영화’로 만들고자 했던 제프리 카첸버그의 의도였다고. 디즈니로부 애니메이터들을 전면 교체하고 디즈니의 지시대로 작업하라는 통보에 추가 작업 시간을 요청, 2주 간의 크런치 모드 끝에 [토이 스토리]는 남녀노소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이야기가 됐고 우디 역시 성장을 거듭하는 입체적인 캐릭터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아메리칸 뷰티 (American Beauty)

이미지: CJ 엔터테인먼트

[아메리칸 뷰티]의 본래 결말은 우리가 아는 것과 사뭇 다르다. 수정 전 각본은 레스터의 딸 제인과 남자친구 리치의 재판 장면으로 끝이 난다. 아버지를 죽여달라는 제인의 음성이 담긴 테이프를 증거로 저지르지 않은 살해 혐의를 받고 억울한 징역살이를 하게 되는데, 재판 과정까지 촬영을 마치고 난 뒤 각본가 앨런 볼이 ‘결말이 지나치게 우울하다’고 느꼈다고. 이미 주요 인물이 사망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어두운 결말인데, 선량한 청소년들이 죄를 뒤집어쓴다는 건 과하다는 판단이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이 집을 떠나는 현재의 결말로 각본이 수정되었고, 그 덕인지 알 수는 없으나 아카데미 감독상과 작품상, 각본상, 남우주연상과 촬영상을 거머쥐게 됐다.

엑스맨 (X-Men)

이미지: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지금이야 ‘울버린’하면 휴 잭맨 말고 다른 사람을 상상할 수조차 없지만, 하마터면 그의 활약상을 영영 보지 못할 뻔했다. [엑스맨] 기획 당시 브라이언 싱어는 러셀 크로우를 1순위로 원했으나 [글래디에이터]와 일정이 겹쳤고, 2순위였던 더그레이 스콧 역시 [미션 임파서블 2] 촬영이 미뤄지면서 캐스팅이 불발되고 말았다. 러셀 크로우의 강력 추천으로 촬영 3주를 앞두고 휴 잭맨이 [엑스맨]에 합류, 이후의 이야기는 우리가 아는 대로다.

로그 원: 스타워즈 스토리 (Rogue One: A Star Wars Story)

이미지: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스타워즈] 팬이라면 [로그 원: 스타워즈 스토리]의 후반부를 잊지 못할 것이다. [스타워즈] 시리즈를 넘어 영화 역사상 가장 카리스마 넘치는 악역으로 불리는 다스 베이더가 반란 연합 수송선에서 보여준 위용은 전율을 느끼지 않는 게 힘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감독 가렛 에드워즈에 의하면, 이 장면은 개봉을 불과 4개월 여 앞둔 최종 편집 과정에서 급하게 촬영한 후 추가되었다고 한다. 이 장면 없이도 [로그 원: 스타워즈 스토리]는 ‘좋은 스핀오프’라는 평가를 받았을 테지만, 감독과 편집자의 번뜩이는 마지막 아이디어는 분명 영화의 화룡점정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터미네이터 2: 심판의 날 (Terminator 2: Judgement Day)

이미지: (주)팝엔터테인먼트

제임스 카메론이 염두에 두었던 [터미네이터 2: 심판의 날]의 본래 엔딩은 한결 희망찼다. 핵폭발 후 모든 게 파멸된 사라 코너의 악몽과 달리, 평화로운 나날을 보여주며 영화가 끝이 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메론은 이러한 해피엔딩이 전작과 [터미네이터 2: 심판의 날]의 톤과 전혀 맞지 않다는 걸 깨닫고, 지금의 결말로 수정을 결정했다고 한다. 만약 기존의 엔딩을 고수했다면 추후 나왔을 [터미네이터] 시리즈 속편들을 보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올 더 머니 (All the Money in the World)

이미지: 판씨네마(주)

개봉을 코앞에 둔 시기에 주연배우가 중범죄를 저질렀다는 게 알려진다면 감독과 제작/배급사는 어떠한 선택을 해야 할까? 대부분은 개봉을 미루거나 아예 상영 자체를 취소할 것이다. 그러나 리들리 스콧은 다르다. [올 더 머니] 개봉까지 불과 한 달 반 정도가 남았던 2017년 11월, 스콧은 과거 성추문 혐의로 논란의 중심에 섰던 케빈 스페이시의 분량을 전부 삭제하고 크리스토퍼 플러머를 ‘존 폴 게티’ 역에 캐스팅해 재촬영을 감행했다. 약 2주 간의 재촬영 끝에 [올 더 머니]는 개봉일을 사흘만 늦추고 스크린에 올랐고, 관객들은 좋은 작품을 볼 수 있게 됐다. 크리스토퍼 플러머는 급한 일정 속에서도 빛나는 연기를 선보이며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저스티스 리그 (Justice League)

이미지: 워너브러더스 코리아(주)

마지막 순간에 결정된 사안들이 모두 ‘신의 한수’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잭 스나이더가 가정사로 [저스티스 리그]에서 하차한 뒤 워너브러더스는 [어벤져스] 조스 웨던에게 영화 후반 작업과 재촬영을 맡겼다. 제작사와 웨던은 잭 스나이더의 작업분 중 대부분을 들어내는데, 개봉까지 채 반년도 넘지 않은 시기에 이루어진 무리한 톤과 스토리 수정, 헨리 카빌의 수염 삭제에 들어간 과도한 CGI는 [저스티스 리그]의 실패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말았다. 아직까지도 ‘스나이더 컷’을 원하는 팬들이 많다는 사실이 영화가 얼마나 실망스러웠는지 보여준다.

판타스틱 4 (Fantastic Four)

이미지: 이십세기폭스코리아

2015년작 [판타스틱 4]는 여러모로 문제가 많았던 작품이다. 조쉬 트랭크 감독과 제작사의 불화, 촬영 중 그의 근무태만과 폭언은 촬영장 분위기를 망치고 결과적으로 흥행에 처참하게 실패하게 만든 요인으로 꼽힌다. 트랭크의 행동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지만, 그가 이렇게까지 기행을 펼치고 멘탈이 무너졌던 데에는 이십세기폭스의 책임도 있다. 촬영 직전 예고 없이 제작비를 삭감하고, 내부 시사 반응이 좋지 않자 조쉬 트랭크를 후반 편집 작업에서 완전히 배제시켰기 때문이다. 이후 각본가 사이먼 킨버그와 제작자 매튜 본의 진두지휘 아래 무리한 각본 수정과 재촬영이 이루어졌는데, 그 결과 그나마 남아있었던 개연성까지 무너지면서 [판타스틱 4]는 ‘최악의 슈퍼 히어로 영화’라는 혹평을 받았다. 조시 트랭크의 온전한 [판타스틱 4]가 흥행에 성공했을지도 미지수지만, 제작사의 무리한 개입이 더 큰 실패를 불러온 것은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