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은 예측 가능하고 동기는 뻔한 캐릭터는 더 이상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얻지 못한다. TV 시리즈들이 넘쳐나면서 시청자는 더 복잡하고 쉽게 가늠하기 힘든 인물들의 이야기를 원한다. 법과 규칙, 윤리의 경계를 아무렇지 않게 넘나드는 안티 히어로들은 시청자가 원하는 무질서한 흥분을 제공한다. 그들은 대담하고 교묘하게 사람들을 속이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리낌 없이 나쁜 선택을 하며, 혹은 대책 없이 무모하게 돌진하는 등 자신들을 둘러싼 세계와 끊임없이 충돌하며 아찔하면서도 흥미로운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단순하게 정의하기 힘들지만 그 같은 반영웅적인 모습이 매력인 캐릭터들은 누가 있을까.

더 보이즈(The Boys, 2019- )

이미지: 아마존

코믹스 원작 드라마 [더 보이즈]는 슈퍼히어로의 영웅 서사를 비튼 과감한 시도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초인적인 능력과 인기 뒤로 온갖 악행을 일삼는 슈퍼히어로 집단 세븐, 히어로를 상품화한 거대 기업 보우트, 그리고 이 모든 부정부패를 밝히려는 자경단 더 보이즈가 극의 중심을 차지한다. 이야기는 오래전 세븐의 리더 홈랜더에게 가족을 잃은 빌리 부처가 세븐 소속 히어로 A-트레인에 의해 연인을 잃은 휴이 캠벨을 멤버로 끌어들이면서 시작한다. 더 보이즈는 세븐처럼 막강한 능력과 권력은 없지만(후에 탈출한 실험체 기미코가 힘을 보탠다), 복수심으로 들끓는 분노와 지치지 않는 근성, 무모함도 불사하는 끈끈한 의리를 앞세워 타락한 슈퍼히어로 집단의 실체를 폭로하기 위해 나선다. (아마존)

뤼팽(Lupin, 2021- )

이미지: 넷플릭스

모리스 르블랑이 창조한 전설의 괴도 ‘아르센 뤼팽’이 새롭게 부활했다. 지난 8일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뤼팽]은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대갚음하려는 남자의 복수극으로, 소설 속 인물을 그대로 차용하는 대신 그를 오마주하는 방식으로 신선함을 꾀한다. 세네갈 이민자 집안 출신의 아산 디오프는 자신의 탐욕을 위해 약자를 무참히 짓밟은 재력가 펠레그리니를 무너뜨릴 계획을 차곡차곡 실행한다. 아버지에게 선물 받은 ‘괴도 신사 뤼팽’이 그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다. 뛰어난 변장술과 대범하고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사람들을 감쪽같이 속이고 유유히 목적을 취하는 뤼팽의 신출귀몰한 수법을 현실 세계로 재현하며 펠레그리니를 압박해간다. ‘뤼팽’에 영감을 얻은 기발하고 재치 있는 복수극은 프랑스 드라마 최초로 미국 넷플릭스 TOP 10에 오를 만큼 세계 각국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넷플릭스)

더 와이어(The Wire, 2002-2008)

이미지: HBO

종영한 지 10년이 지났어도 역대 최고의 드라마 중 하나로 꼽히는 작품이다. 기자 출신 데이빗 사이먼과 전직 경찰 에드 번즈가 각본을 맡아 다큐멘터리를 보듯 생생하고 사실적인 느낌이 가득한 형사 드라마를 완성했다. 단순히 볼티모어 빈민가를 거점으로 활동하는 마약 범죄 조직을 무너뜨리려는 수사물에 그치지 않고, 시즌을 거듭할수록 미국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을 폭넓게 아울러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다. 인물들 또한 선과 악의 이분법적인 틀에 갇히지 않고 입체적인 모습으로 강한 몰입감을 선사하는데, 그중 강력계 형사 지미 맥널티는 대표적인 안티 히어로 캐릭터다. 뛰어난 능력과 뚜렷하게 대비되는 비타협적이고 자존심 강한 태도 때문에 상관의 미움을 사고 마찰을 일으키지만, 수사의 중심에서 이야기를 이끈다. (왓챠)

데미지(Damages, 2007-2012)

이미지: DirecTV

유능하고 무자비한 변호사 패티 휴즈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거침없이 직진하는 인물이다. 아무렇지 않게 법과 도덕의 경계를 넘나들며, 권력과 지위를 악용하는 부패한 기업들을 목표로 삼는다. 로스쿨을 졸업한 순진한 인재 엘렌 파슨스는 패티의 로펌에 입사하면서 파란만장한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데미지]는 두 사람의 복잡하고 애증 어린 관계를 치밀하게 구축하면서 기업을 상대하는 법정 드라마를 펼쳐 보인다. 선형적인 구조를 따르는 기존의 법정물에서 벗어나 플래시백을 배치하고 사건을 둘러싼 이야기에 궁금증을 유발하는데, 강력한 카리스마로 압도하는 패티와 그에게 실망하고 분노하며 변화하는 엘렌의 관계가 흥미진진하다. (웨이브)

덱스터(Dexter, 2006-2021)

이미지: Showtime

제프 린제이의 소설을 옮긴 [덱스터]는 이중생활을 하는 연쇄살인범이 등장한다. 평상시에는 괴짜스러운 면모가 있는 혈흔 분석가로, 밤에는 악질 범죄자를 처형하는 살인마로 활동하는 덱스터 모건이다. 어릴 적부터 강한 살인 충동에 휘둘렸던 그는 경찰이었던 양아버지 해리의 엄격한 가르침에 따라 섬뜩한 본능을 철저하게 숨기고 살아온 인물이다. 타인의 감정에 무심하고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사이코패스 기질이 다분하나 놀라운 자제력과 어두운 유머 감각으로 기존의 안티 히어로들과 차별화되는 사악한 위치를 선점했다. 2013년 시즌 8에서 아쉬움을 가득 안고 퇴장했으나 올해 10부작 리미티드 시리즈로 다시 돌아올 예정으로, 그 이후의 이야기에 관심이 쏠린다. (왓챠)

킬링 이브(Killing Eve, 2018- )

이미지: 왓챠

산드라 오와 조디 코머의 환상적인 호흡이 빛나는 [킬링 이브]는 전혀 다른 두 여성의 상호 집착적인 관계성이 두드러진 추격 스릴러로 사랑받는 작품이다. 기존 첩보 장르의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개성 강한 여성 캐릭터들이 빚어내는 예측불허의 이야기로 차별화된 재미를 선사하는데, 그 중심엔 MI5 요원 이브와 사이코패스 킬러 빌라넬이 있다. 심술궂은 장난기 가득한 빌라넬이 부도덕한 권력자들을 포함해 거리낌 없이 저지르는 살인은 잔인무도한데도 묘한 희열을 선사하며, 그 대척점에서 지루한 나날을 보내던 이브가 의문의 암살자를 쫓으면서 점차 삶의 에너지를 얻고 욕망에 이끌리는 모습이 흥미를 자아낸다. 서로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준 이브와 빌라넬의 이야기는 올해 네 번째 시즌으로 돌아올 예정이다. (왓챠)

미스터 로봇(Mr. Robot, 2015-2019)

이미지: USA

샘 에스마일의 [미스터 로봇]은 매트릭스, 파이트 클럽, 로빈 후드가 만난(데일리 텔레그래프) 드라마다. 낮에는 사이버 보안 기술자로, 밤에는 익명의 해커로 활동하는 은둔형 프로그래머 엘리엇이 지하 해커 조직 FSociety를 이끄는 미스터 로봇을 만나 사이버 혁명에 동참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그들의 타깃은 세계 굴지의 기업인 E Corp, 재무 데이터를 암호화하고 모든 부채 기록을 파기하는 게 목표다. 하지만 혁명 전후로 엘리엇의 기억은 혼란스럽고, 의도와 달리 혁명은 극소수의 기득권층에 더 유리해진다. [미스터 로봇]은 불안장애, 우울증, 망상, 편집증을 앓는 소외된 인물을 내세우고 불안정한 기억을 쉴 새 없이 오가며 21세기 자본주의의 음울한 이면을 그려낸다. (아마존)

프리즌 브레이크(Prison Break, 2005-2017)

이미지: FOX

마이클 스코필드는 절박한 상황에 처한 인물이다. 그의 형 링컨 버로우스가 살인 누명을 쓰고 사형수가 되자, 형을 구하기 위해 은행강도를 계획하고 현장에서 체포돼 스스로 죄수가 된다. 미국은 물론 국내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끈 [프리즌 브레이크] 이야기다. 열풍의 중심엔 형의 결백을 증명하고자 온몸에 교도소 설계도면을 문신으로 새기고 자발적인 범죄자가 된 마이클이 있다. 웬트워스 밀러의 훈훈한 비주얼은 덤이다. 드라마는 긴장감 넘치는 전개로 탈옥 과정을 치밀하게 그려내 호평을 받았으나 시즌이 계속되면서 정치적 음모에 초점을 맞추는 산으로 가는 이야기로 실망스러운 반응을 얻었다. 하지만 정교하고 대담하게 목표에 향해가는 마이클은 잊을 수 없는 캐릭터로 남았다. (넷플릭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