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권나연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행동이 더 중요하다고 한다. 하지만 때로는 말을 하지 않으면 영영 알 수 없는 것도 있다. 2시간 남짓한 영화의 스크린 타임 전체를 아우르며 캐릭터의 핵심 정수를 정확하게 꿰뚫는 대사가 있다면, 그야말로 한 마디 말이 백 번의 행동보다 더 중요하다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영화 속에서 잘 정제된 대사를 만날 때마다 ‘멋스러움’과 ‘맛스러움’을 고스란히 느낀다. 모두의 사랑을 받아온 MCU 캐릭터들의 대표 대사를 꼽아보았다.

이미지: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호크 아이 “도시가 하늘을 떠다니고 있지, 로봇 군대에 맞서 싸우고 있지, 그런데 나한텐 고작 활 한 자루와 화살이 전부야. 말도 안 되는 상황이라고. 하지만 난 밖에 나가 싸울 거야. 그게 내 일이니까.”

[어벤져스 : 에이지 오브 울트론]에서 영웅들은 소코비아를 이용해 지구를 멸망시키려는 울트론과 맞서 싸운다. 막시모프 남매는 처음엔 울트론의 편에 서서 영웅들을 적대시했지만, 울트론의 파괴적인 계획을 알게 된 후로는 영웅들과 함께 세상을 구해내고자 한다. 아비규환이 된 소코비아의 전장에서 혼비백산한 완다를 진정시켜주기 위해서, 점점 격해지는 싸움을 앞두고 그의 결의를 확인하기 위해서 호크 아이가 완다에게 건네는 대사가 인상적이다. 어벤져스의 여타 동료들이 지닌 초능력에 비해 활과 화살이라는 능력치는 다소 심심하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호크 아이는 그러한 사실을 충분히 객관적으로 인지하고 있다. 냉정하게 따져보았을 때 로봇 군대를 활로 저지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상황임에도 그는 결코 노력을 멈추지 않고 영웅의 의무를 다한다.

이미지: 소니픽쳐스 릴리징 월트디즈니 스튜디오스 코리아(주)

블랙 위도우 “진실은 상황에 따라서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거야.”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에서 캡틴 아메리카와 블랙 위도우는 줄곧 영웅들을 보조해왔던 범세계적 첩보기관 S.H.I.E.L.D.가 사실은 악의 세력인 하이드라에 의해 잠식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도망자 신세가 된다. 하이드라 요원을 피해 도망치는 과정에서 두 사람은 눈속임을 위해 짧게 입을 맞춘다. 얼음 속에 갇혀 오랫동안 동면 상태였던 캡틴의 사정을 아는 위도우가 키스 실력을 두고 농담을 던진다. 화제는 금세 연애 기류 쪽으로 옮겨간다. 캡틴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인 사람이 둘도 없다 보니 연애하기가 어렵다는 듯이 대답한다. 위도우는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하면 되지 않느냐고 말한다. KGB 스파이 출신이며 S.H.I.E.L.D.의 명령이라면 어디든 침투해 그 어떤 신분으로 둔갑하여 첩보활동을 해내는 블랙 위도우에게 이보다 적합한 대사는 또 없다. 그에게 거짓말은 아이러니하게도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생존 전략이었으며, 그러한 사실이 위도우를 바라보는 관객의 마음을 씁쓸하게 만든다.

이미지: 소니픽쳐스 릴리징 월트디즈니 스튜디오스 코리아(주)

그루트 “우리는 그루트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주연 캐릭터들은 하나 같이 주류에 섞이지 못하는 괴짜 무법자들이다. 거액의 현상금, 값나가는 고대 유물, 가족의 복수 등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들로 한데 모인 그들이 갈등을 뒤로하고 공공의 적과 함께 맞서 싸우며 끈끈한 정을 쌓아가는 과정은 작품의 별미다. 멤버 중 그루트는 어떤 상황에서도 “나는 그루트다”라는 말밖엔 하지 못하는 나무 외계인이다. 자기 몸에 난 새싹을 뜯어먹고, 분수대의 물을 떠먹는 등 백치 같은 모습을 보여주지만, 자신의 목숨을 희생해 모두를 지키는 클라이맥스 장면에서는 이기적이고도 속물적인 멤버 모두를 한데 묶어주는 호칭을 사용하며 “우리”라고 집단 정체성을 부여한다. 이 순간만큼은 그루트는 그 누구보다도 가슴 따뜻한 팀의 핵심 중추다.

이미지: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캡틴 마블 “네게 증명할 필요는 없어.”

크리 제국의 욘-로그는 폭발 사고로 강력한 초능력을 얻었으나 기억을 잃게 된 지구인 여성을 거두어 비어스라는 이름을 주고 크리 제국을 섬기는 병사로 육성한다. 비어스는 욘-로그 밑에서 훈련을 받으며 강해지고 싶다면 끊임없이 감정과 기억과 초능력을 제어해야만 한다고 강요받는다. 지구에 불시착한 그는 여러 사람들과 만나 다양한 일들을 겪으며 잃어버린 기억의 파편들을 수거해나간다. 완전한 기억을 되찾은 그 이름 캐롤 댄버스는 이제 욘-로그의 조작적인 화법에 넘어가지 않는다. 캐롤의 강인함은 감정과 초능력을 제어하고 절제함에서 얻어내는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의 강인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캐롤이 성취해낸 성장이다. 그것은 다른 누가 인정해주지 않아도, 그는 이미 충만하다.

이미지: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아이언맨 “나는 아이언맨이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포문을 연 대표주자로서 십여 년간 우리 곁에 함께 했던 아이언맨을 떠올리면 이 대사가 가장 먼저 생각날 것이다. [아이언맨]의 마지막에서 그는 혜성처럼 등장한 하이테크 강철 갑옷의 사나이에 대해 거짓말로 기자회견을 하도록 지시받았지만,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은 바로 억만장자 CEO인 자신이 바로 그 사람이라고 시인하는 말이었다. 올바른 길을 걷고자 결심한 뒤에도 가볍고도 비대한 자의식에 발로한, 다분히 충동적인 한 마디였다. [아이언맨 3]의 마지막에서 이 대사는 반복된다. 불안과 트라우마를 견디기 위해 고군분투한 끝에 병적으로 만들어냈던 강철 갑옷은 번데기에 불과했으며, 아이언맨이라는 영웅이 지니는 진정한 가치는 바로 번데기 안에 잠들어있던 본체, 토니 스타크라는 인간이 오롯하게 지니고 있었음을 천명한다. 그리고 이 대사는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 토니 스타크의 멀고도 험난했던 캐릭터 서사에 방점을 찍는 마지막 대사이기도 하다. 실로 아이언맨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