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추지 말았어야 했다. 과장을 조금 보태 ‘한국판 [스피드] 같네’라는 생각이 든 순간도 분명 있었지만, 도로 위를 질주하던 차가 멈춰선 동시에 긴장감이 탁 풀리고 말았다. 영화 [발신제한]의 이야기다.

이미지: CJ ENM

은행센터장인 성규는 출근길에 발신번호 표시제한 전화를 받는다. 그는 “차에 폭탄이 설치됐으니 살고 싶으면 거액의 돈을 준비하라”는 협박을 단순한 보이스피싱이라 여긴다. 그러나 눈앞에서 직장 동료의 차가 폭탄에 터지는 걸 목격한 이후, 수화기 너머의 남자가 결코 장난전화나 보이스피싱 따위를 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자칫 내렸다간 저들과 똑같은 처지가 될 것이기에 꼼짝없이 갇힌 상황. 설상가상 폭탄 테러 용의범으로 몰려 경찰에게 추격까지 당하면서 성규는 전화기 속 남성의 요구를 따를 수밖에 없다.

익숙한 이야기다. 한정된 공간에 갇힌 주인공이 누군가의 협박을 받으며 생과 사를 오간다는 설정은 기존 범죄 스릴러물에서 종종 본 것이고, 영화는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기로 선택했다. 자칫 ‘무난한 범죄 스릴러 영화’라는 평가를 받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발신제한]은 기시감을 타파할 무기들을 꺼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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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영화 초반부 속도감이 상당하다. 별다른 상황 설명 없이 영화 시작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차가 폭발하고, 성규는 ‘나와 내 아이들이 정말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부산 거리를 질주하기 시작하니, 관객 역시 그 긴박한 현장에 있는 것처럼 자연스레 몰입하게 된다. [더 테러 라이브], [끝까지 간다] 등 특유의 긴장감 넘치는 전개로 호평받은 범죄 스릴러들의 편집감독 출신인 김창주 감독의 연출력이 돋보이는 지점이다. 서울이 아닌 부산을 배경으로 택한 것 또한 의외의 신선함을 선사한다.

배우들의 열연도 빛난다. 이번 작품에서 주연배우로 첫 발을 내디딘 조우진은 딸과 아들을 지키려는 아버지 성규의 절박함을 흡입력 있게 선보였고, 이재인은 딸 혜인으로 분하며 좋은 호흡을 보여주었다. 초반부 다소 거리감이 있던 부녀가 위기 속에서 점점 가까워지는 모습은 은근한 감동을 안겨주기도 한다. 성규를 극한의 상황에 몰아넣는 범인, 진우를 연기한 지창욱의 존재감도 인상적이다. 직접 출연한 분량보다 목소리 연기의 비중이 더 크긴 하나,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차가운 목소리가 매력적이다. 추격전이 주는 속도감과 별개로, 한정된 공간 안에서 대사와 표정 위주로 극이 전개돼도 긴장을 늦출 수 없던 이유는 전적으로 배우들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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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영화 중반 성규가 해운대 해수욕장에 차를 멈춰 세우면서 장르적 재미도 함께 멈추고 만다. 지금껏 긴박하게 달리던 차가 대뜸 멈춰버리니, 그동안 손에 땀을 쥐고 지켜보던 관객 입장에선 맥이 빠질 수밖에 없다. 물론 이전까지 서먹했던 부녀관계가 회복되고, 경찰이 본격적으로 사건에 개입하며, 그동안 정체를 알 수 없던 진우가 모습을 드러내는 등 굵직한 사건도 있기에 의미 없는 장면의 연속은 아니지만, 이를 영화의 ‘템포 조절’이라 하기엔 멈춰 있던 시간이 너무나도 길었다. 94분이라는 짧은 시간이 체감상 지루하게 느껴진 이유는 이 부분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 스릴러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무능한 경찰’ 설정도 몰입감을 해친다. 극중 정상적인 경찰은 진경이 연기한 반 팀장뿐, 나머지는 사건 해결에 도움은커녕 제대로 된 대처조차 하지 못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성규를 테러 용의자로 지목하는 과정에서도 고개를 갸웃했지만, 앞서 이야기한 해수욕장 장면에선 특히 허술하다. 아무리 극적인 연출을 위해서라고 해도, “용의자의 가족”이라는 진우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아무런 신원조회 없이 그를 사건 현장에 들여보내는 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단순히 ‘경찰이 무능하다’보다 ‘범인이 경찰보다 우위에 있다’는 설정이었다면 훨씬 더 풍성하고 긴장감 넘치게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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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중반의 서스펜스를 끝까지 지키지 못한 건 분명 아쉽다. 그러나 [발신제한]은 드넓은 도심을 질주하는 자동차 추격물과 제한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밀실 스릴러라는 상반된 두 장르의 매력을 제법 잘 조합한 작품이다. 무엇보다 ‘원톱 주연배우’ 조우진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이 작품은 극장에서 즐기기에 아깝지 않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