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봄동

얼마 전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이하 ‘MCU’)의 차기작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의 예고편이 공개되면서 전 세계 덕후들은 열광의 도가니에 빠졌다. 페이즈 3의 [닥터 스트레인지]에서 처음 언급됐던 ‘멀티버스(평행 우주)’의 개념이 더욱 구체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간 루머로 간간히 언급됐던 소니 픽쳐스 측 [스파이더맨] 시리즈 빌런들의 복귀가 사실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주목해야 할 점은 여러 모로 멀티버스와 깊게 얽혀 있는 닥터 스트레인지도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에 큰 비중으로 등장한다는 사실. [어벤져스: 엔드게임] 이후 통 볼 수 없었던 이 냉철한 마법사의 근황도 궁금하지만, ‘믿고 보는 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MCU로 복귀한다는 것 역시 팬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소식이다. 영화 개봉을 기다리는 한편, 히어로가 되기 훨씬 전부터 깊은 연기 내공을 간직하고 있었던 그의 TV 속 필모를 복습한다면 꽤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을지도.

셜록 (Sherlock)

이미지: BBC

“아, 얘 걔잖아. 셜록!”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긴 이름은 기억 못해도 그의 얼굴을 통해 세계 최고의 명탐정을 떠올리는 건 매우 쉬운 일이다. 시즌 4까지 엄청난 인기 속에 방영된 BBC [셜록]은 이전까지 연기력에 비해 인지도가 낮았던 컴버배치를 월드스타로 만들어 준 ‘인생작’이다. 메리의 죽음으로 시작해 피날레까지 충격과 공포의 연속이었던 시즌 4 이후, 후속 시즌의 제작 여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며 간간이 루머만 떠돌 뿐이다. [셜록]의 대성공 이후 주연인 컴버배치와 마틴 프리먼이 상당히 바쁘신 몸이 된 만큼 배우 및 제작진이 다시 뭉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듯하다. 게다가 허드슨 부인을 연기한 배우 우나 스텁스가 지난달 지병으로 사망하면서 팬들의 아쉬움이 더욱 깊어졌다. (넷플릭스)

아가사 크리스티: 미스 마플 (Agatha Christie’s Marple)

이미지: ITV

[셜록] 시즌 1의 방영으로부터 정확히 2년 전인 2008년, 컴버배치는 비록 미미한 역할이었으나 이미 추리 드라마에 발을 담그고 있었다. 이 추리 드라마는 바로 영국의 대문호 아가사 크리스티의 대표 탐정 캐릭터 ‘미스 마플’을 주인공으로 한 ITV의 [아가사 크리스티: 미스 마플]. 컴버배치는 시즌 4의 두 번째 에피소드 ‘너무나 쉬운 살인(Murder Is Easy)’에서 미스 마플의 추리를 돕는 조력자, 루크 역으로 출연했다. 주인공이 아니니 지금과 비교하면 매우 짠내 나는 출연 분량이나, 앳된 얼굴과 한결같은 꿀성대를 한꺼번에 보고 듣는 데서 오는 기쁨은 무시하기 힘들다. 컴버배치를 신경 쓰지 않더라도 얌전해 보이는 독신 여성이 날카로운 관찰력으로 각종 사건을 해결하는 흥미진진한 스토리에 어느 순간 푹 빠질 수 있으니 조심(?)할 것. (왓챠, 웨이브, 티빙)

퍼레이즈 엔드 (Parade’s End)

이미지: BBC

포드 매덕스 포드가 집필한 동명의 소설 시리즈를 각색한 BBC [퍼레이즈 엔드]는 ‘베니(팬들이 컴버배치를 부르는 애칭)’의 필모 중 기본적으로 정주행해야만 하는 작품이다. 제1차 세계대전 직전 및 직후의 혼란스러운 영국이 배경이며, 컴버배치는 극중 아내 실비아와 깊은 애증을 나누는 주인공 크리스토퍼를 연기했다. 이 드라마는 한 마디로 ‘잔잔하듯 휘몰아치는 삼각의 막장’이다. 크리스토퍼는 결혼 초부터 불륜 등 온갖 부도덕함으로 끊임없이 고통을 안겨주는 실비아를 내치지 못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과 사상적으로 대척점에 선 여성 운동가 발렌틴과 사랑을 나눈다. 이 ‘두 집 살림’이 다섯 편 내내 이어지는 고구마 전개로 인해 툭하면 가슴이 답답해지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도 컴버배치의 로맨틱하고 세련된 스타일이 그립다면 꼭 시청하길 권한다. 참고로 컴버배치는 이 작품을 통해 에미상 남우주연상 후보로 지명되기도 했다. (웨이브)

할로우 크라운: 장미의 전쟁 (The Hollow Crown: The Wars of the Roses)

이미지: BBC

BBC 대표 사극으로 손꼽히는 [할로우 크라운]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4부작 『헨리아드』를 영상화한 대작이다. 2012년 방영된 첫 시리즈는 벤 휘쇼, 제레미 아이언스, 톰 히들스턴이 각각 리처드 2세, 헨리 4세, 헨리 5세를 맡아 영국 왕실의 격동기를 생생하게 전달했다.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리처드 3세로 분한 속편 [할로우 크라운: 장미의 전쟁]은 영국의 가장 유명한 내전인 ‘장미 전쟁’을 다룬 이야기로 2016년에 방영됐다. 셰익스피어에 의해 매우 복잡한 악인으로 묘사된 리처드 3세는 지금까지도 역사적으로 논란거리가 많은 군주인데, 컴버배치는 사악하면서도 유약한 인간 그 자체인 리처드 3세를 맞춤 정장처럼 소화하며 찬사를 받았다. 시대물 덕후이면서 본인이 좋아하는 배우(컴버배치든 혹은 다른 사람이든)가 나온다면 특히 놓쳐서는 안 될 작품이다.

패트릭 멜로즈 (Patrick Melrose)

이미지: Showtime

영국 Sky와 미국 쇼타임이 공동 제작한 [패트릭 멜로즈]는 현대 영국 문학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동명의 소설을 실사화한 리미티드 시리즈다. 원작자 에드워드 세인트 오빈은 어린 시절 아버지의 성폭력에 희생된 이후 술과 약물을 도피처 삼아 방황하던 자신의 삶을 직접 치유하고자 [패트릭 멜로즈] 5부작을 무려 20년간 집필했다. 이처럼 작품의 탄생 배경부터 심금을 울리는 [패트릭 멜로즈]는 타이틀롤을 맡은 컴버배치의 처연한 내면 연기를 통해 TV에서도 매력적인 성장 겸 힐링 드라마로 완성되었다. 재미있는 점은 2018년 5월 드라마가 방영되기 전부터 컴버배치가 [패트릭 멜로즈] 출연을 자신의 ‘버킷 리스트’로 언급해 왔다는 건데, 이쯤 되면 운명의 힘을 믿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멋진 징조들 (Good Omens)

이미지: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열성 팬들조차도 [멋진 징조들]을 언급하면 “응? 베니가 거기 나왔다고?”라고 말하며 고개를 갸우뚱할 수 있다. 그도 그럴 게 컴버배치는 이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 시리즈에서 목소리로만 출연하기 때문이다. 그의 배역은 극중 가장 핵심적인 캐릭터인 ‘적그리스도’의 아버지이자 지옥을 다스리는 악마들의 왕, 사탄이다. 컴버배치 특유의 저음이 입혀진 사탄의 무시무시한 위용은 클라이맥스에 걸맞은 긴장감을 더욱 북돋워 주었다. 사탄은 [멋진 징조들] 막판의 아마겟돈에서 딱 한 번 짧게 등장하지만, [호빗] 시리즈와 [그린치] 등 여러 영화를 거치며 더욱 자연스러워진 컴버배치의 더빙 연기를 통해 시청자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다. 한편 닐 게이먼-테리 프래쳇 콤비의 동명 소설이 원작인 [멋진 징조들]은 2022년 시즌 2로 돌아올 예정이다. 시즌 1에 소설 내용의 대부분이 들어간 만큼 시즌 2는 오리지널 스토리로 진행될 가능성이 큰데, 컴버배치가 연기하는 사탄이 다시 등장할지, 만약 재등장한다면 스토리 전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기대되는 바다.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

에디터 봄동: 책, 영화, TV, 음악 속 환상에 푹 빠져 사는 몽상가. 생각을 표현할 때 말보다는 글이 편한 내향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