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하반기 한국 드라마는 ‘사극의 향연’이라 할 만하다. 8월부터 12월까지 한 달에 한 편 꼴로 정통 사극부터 멜로, 코미디까지 다양한 사극이 방영될 예정이다. 그 포문을 연 작품은 오랜 준비 끝에 세상에 나온 판타지 로맨스 사극 [홍천기]다.

상반기 방송가에선 ‘드라마의 상상력’에 대한 뜨거운 논의가 있었다. [홍천기] 또한 이 논의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원작 자체가 조선 세종 때가 배경이며,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이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같은 채널에서 방영한 [조선구마사]가 역사왜곡 논란으로 2회 만에 종영했기 때문에 후속작을 바라보는 시선이 날카로운 건 당연하다. 드라마가 논란을 피한 방법은 바로 조선을 모델로 한 가상의 국가를 설정한 것이다.

이미지: SBS

[홍천기]는 가상 국가 단국이 배경이며, 신령한 힘을 가진 여성 화공 홍천기와 별자리를 읽는 붉은 눈의 남자 하람이 중심이다. 이들은 삼신할망과 점지로 태어난 순간부터 운명으로 묶였다. 9년 후, 소년 하람은 아버지를 돌보는 맹인 소녀 천기와 우연히 만나고, 함께했던 순간을 강렬하게 기억한다. 하지만 나라의 우환을 해결하려는 기우제에서 어떤 사건이 벌어지면서 하람은 시력을 잃고, 천기는 시력을 회복한다. 다시 19년 후, 뛰어난 화공이 된 천기와 별을 읽는 서운관 주부가 된 하람은 다시 만나고 서로의 정체를 확신하지 못한 채 빠져든다.

[홍천기]는 판타지 로맨스 드라마답게 판타지 설정을 적극 활용한다. 세상을 다스리는 힘의 균형이 깨지면서 생명과 죽음의 힘이 대립하고, 인간은 죽음의 힘을 받아들여 권력을 쟁취했다. 힘을 봉인하는 데는 신령한 힘을 가진 화가가 그린 왕의 초상화가 이용된다. 하람이 초상화에서 탈출한 마왕을 몸에 담으면서 시력을 잃고, 하람의 운명이 짝인 천기는 그 마왕을 다시 봉인할 만한 신령한 힘을 지닌 화공이 된다. 이들의 운명은 마왕의 힘을 빌어서라도 옥좌를 차지하고 싶은 왕의 둘째 아들 주향대군과 맞서면서 풍랑에 휩쓸린다.

이미지: SBS

드라마는 극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설정을 먼저 설명하려 한다. 즉 1화에 전체적인 설정이 모두 담겨 있다. 마왕 봉인 의식, 천기와 하람이 태어날 때부터 인연이 되고 9년 후 만나 설렘을 느끼는 것, 마왕의 봉인이 풀려 새로운 몸을 찾으면서 하람의 눈이 붉은색으로 변하고 천기의 시력이 회복되는 내용이다. 게다가 서사의 다른 축이 될 대군들까지 등장한다. 아무리 이야기를 영리하게 배치한다 해도 빽빽하게 느껴지고, 시청자는 이를 힘겹게 따라가야 한다. 어렵고 낯선 설정을 한꺼번에 빠르게 푸는 것은 불가피한 선택이겠지만, 불친절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초반에 낯설고 많은 내용을 다룰 수밖에 없다면, 연출과 편집 등 다른 부분에서 완급을 조절해야 한다. [홍천기] 초반부에 보는 사람마저 여유를 느낄 수 없는 건 그 부분이 성공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장면을 따로 떼놓으면 아름답거나, 경쾌하거나, 진지하거나, 설레는 부분은 많지만, 이 요소가 처음부터 끝까지 매끄럽게 이어지거나 리듬감 있게 진행되진 않는다. 한편 1화 방영 직후에 마왕의 비주얼과 시각효과에 대한 비판이 많았다. 캐릭터 디자인은 아쉽지만, 한국 드라마 중 CG 비중이 큰 판타지 사극이 드물고, 회차가 거듭되며 CG 비중도 줄고 있어서 용인할 만하다.

배우들의 빛나는 열연은 드라마에 생기를 돌게 한다. 오랜만에 사극에 출연한 김유정은 믿고 보는 배우답게 강하고 아름다운 ‘천기’를 잘 표현한다. 여러 삶을 살고 있는 ‘하람’ 역의 안효섭의 연기도 인상적이다. 공명의 ‘양명대군’은 천기, 하람과의 삼각관계의 한축뿐 아니라 코믹 릴리프도 담당한다. 하지만 에디터의 심(心)스틸러는 왕권을 탐내는 ‘주향대군’의 곽시양이다. 등장할 때마다 그만의 카리스마로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 글을 쓰는 지금 [홍천기]는 4화 방영을 마쳤다. 안팎으로 기대와 우려를 안고 시작했지만, 다행히 좋은 반응을 얻으며 사극 불패 신화를 이어갈 조짐을 보이고 있다. 작품이 펼친 방대한 세계관에 적응하기 어렵고 아쉬운 부분은 있지만, 이를 상쇄할 만한 매력도 분명히 존재한다. [홍천기]의 존재가 ‘사극의 상상력’의 경계를 어디까지 확장할 수 있을지 지켜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