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봄동

모두가 오매불망 기다리던 디즈니 플러스가 마침내 지난 12일 한국에 상륙했다. 일각에서는 OTT 서비스가 날로 늘어나 돈이 더 새어 나간다고 불평할 만도 하다. 하지만 시청자 입장에서는 디즈니 오리지널 시리즈 또는 영화를 비롯해 더욱 다양한 콘텐츠를 볼 수 있으니, 어찌 보면 행복한 고민이다. TV 시리즈 부문만 보더라도 [완다비전], [팔콘과 윈터 솔져], [로키]와 24일부터 공개되는 [호크아이]까지, 인피니티 사가 이후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주인공들이 전하는 새로운 이야기가 포진해 있다. 여기에 더 반가운 소식은 다른 OTT에서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레전설’ 드라마, 그리고 최근 몇 년간 방영된 비교적 새로운 작품들도 디즈니 플러스로 만날 수 있다는 것!

X-파일 (The X Files, 1993-2018)

이미지: 디즈니 플러스

폭스의 고전 수사물 [X-파일]은 유독 국내 OTT에서 보기 힘든 드라마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제 디즈니 플러스에서 총 11개의 시즌을 마음껏 골라 볼 수 있다. 여느 범죄물처럼 강력 사건을 다루면서도 외계인, 유령, 괴물, 기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현상을 파헤치는 독특한 플롯, 그리고 남성과 여성이 한 팀이 되어 수사를 진행한다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캐릭터 설정으로 수많은 드라마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X-파일]은 시즌 9 이후 14년 만인 2016년 시즌 10으로 안방극장에 복귀했고, 뒤이어 2018년 피날레 시즌 11이 방영됐으나 이전만큼 화제가 되진 못했다. 세월이 무수히 흐른 만큼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지만, 데이빗 듀코브니와 질리언 앤더슨의 찰떡 호흡을 집에서 언제든 돌려 볼 수 있다는 점은 그저 감사할 일이다.

러브, 빅터 (Love, Victor, 2020-)

이미지: 디즈니 플러스

디즈니 계열 스트리밍 서비스인 훌루를 통해 공개된 [러브, 빅터]는 2018년 개봉한 영화 [러브, 사이먼]의 스핀오프 시리즈다. 주인공 빅터는 영화의 주인공 사이먼처럼 동성애자로서의 정체성 때문에 고민하는 소년으로, 같은 고등학교에 다니는 사이먼에게 조언을 구하며 본인만의 이야기를 펼친다. 사이먼이 백인 소년인 것과 달리, 빅터 역에 히스패닉 배우인 마이클 시미노를 캐스팅했다는 점에서 다양성을 확보하려는 디즈니의 끊임없는 노력이 엿보인다. 스토리 측면에서도 게이임을 숨긴 채 여자친구와 교제하거나 가족들과 갈등을 벌이는 등 여러 부분에서 현실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올해 6월 시즌 2가 공개됐지만, 한국 디즈니 플러스에는 시즌 1만 서비스 중이다.

원스 어폰 어 타임 (Once Upon a Time, 2011-2018)

이미지: 디즈니 플러스

ABC [원스 어폰 어 타임]은 “옛날 옛날에~”를 뜻하는 제목 그대로 서양의 동화, 전설, 신화 속 주인공들이 현실 세계에 출몰하면서 빚어지는 사건사고를 그린 판타지 시리즈다. ABC가 디즈니 산하 방송사다 보니 디즈니·픽사의 오리지널 애니메이션이 극중 매우 빈번하게 각색되는 점이 특징인데, 시즌 4에서는 [겨울왕국] 캐릭터들이 등장해 색다른 재미를 선사하기도 했다. [원스 어폰 어 타임]의 동화 캐릭터들이 기억을 잃고 현실을 방황하는 것은 따지고 보면 백설공주와 이블 퀸의 악연 때문인데, 공교롭게도 백설공주 역의 지니퍼 굿윈과 이블 퀸 역의 라나 파릴라는 [와이 우먼 킬]의 시즌 1과 2에서 각각 베스 앤과 리타를 연기한 바 있다. 미디어가 옛이야기들을 레퍼런스로 활용하는 방식이 궁금하다면 한 번쯤 시간을 내 정주행하기 좋은 작품이다.

넥스트 (Next, 2020)

이미지: 디즈니 플러스

2020년 폭스에서 방영된 [넥스트]는 영화 [엑스 마키나]와 [트랜센던스]처럼 인공지능(AI)의 진실과 위험을 경고하는 작품이다. 실리콘 밸리의 거물 기업가인 폴 르블랑이 죽음을 눈앞에 둔 상태에서 FBI 요원 시어 살라자르와 손잡고 자신이 개발한 AI ‘넥스트’를 없애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을 그린다. 코로나19로 인해 방영이 연기되는 악조건 속에서 시청자들을 찾았으나, 호불호가 갈리는 반응을 얻은 끝에 후속 시즌은 캔슬됐다. 그래도 [매드 맨]의 로저 스털링 주니어,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하워드 스타크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존 슬래터리 특유의 냉철한 아우라는 반갑게 느껴진다.

리전 (Legion, 2017-2019)

이미지: 디즈니 플러스

FX [리전]은 코믹스를 실사화한 미드 중에서도 가장 실험적이고 도발적인 작품이라 할 만하다. 원작에서 가히 신(神) 수준의 다중인격 뮤턴트였던 데이빗 할러, 일명 ‘리전(Legion)’은 드라마에서도 정신분열증을 독보적인 능력으로 폭발시키며 시청자의 몰입을 유도한다. [미녀와 야수], [다운튼 애비] 등에서 세련된 미모와 중저음으로 여심을 사로잡았던 댄 스티븐스는 불안 속에 절대적인 카리스마를 숨긴 데이빗 캐릭터를 완벽하게 소화했으며, 한때 [리전]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합류에 대한 팬들의 기대가 솟구치기도 했다. 원작 코믹스의 리전을 사랑한다면 애증의 부자인 데이빗과 찰스 자비에(프로펙서 X)가 마지막 시즌 3에서 어떻게 힘을 합치고 서로를 진정으로 이해하는지 꼭 확인하길 바란다. 넷플릭스에 아직 전편이 남아 있긴 하지만, 기존 디즈니 콘텐츠들처럼 언제 내려갈지 모르니 디즈니 플러스로 보는 게 최선일지도.

9-1-1 (2018-)

이미지: 디즈니 플러스

폭스에서 2018년부터 올해 시즌 5까지 방영된 [9-1-1]은 경찰관, 소방관, 응급 전화 상담사 등 위험의 최전선에 선 LA 지역 구조대원들의 일상을 다룬 드라마다. 라이언 머피, 브래드 팰척, 팀 마이너 등 스타 크리에이터들이 공동 제작한 만큼 긴박하고 위험천만한 상황이 실감 나게 전개된다. [이프 온리], [고스트 위스퍼러]의 제니퍼 러브 휴잇, [블랙 팬서]의 안젤라 바셋과 [퍼스트 어벤져], [스파이더맨: 홈커밍]의 케네스 최 등 낯익은 배우들의 호연이 돋보인다. 한국 디즈니 플러스에서는 시즌 1~3와 스핀오프 [9-1-1: 론 스타]를 볼 수 있다. [9-1-1: 론 스타]의 주연은 [반지의 제왕] 시리즈의 아르웬으로도 유명한 리브 타일러다.

24 (2001-2010)

이미지: 디즈니 플러스

폭스의 또 다른 대표작 [24]는 [제이슨 본] 시리즈와 더불어 현실적인 21세기 첩보물의 방향을 잡은 선구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주인공 잭 바우어를 맡은 키퍼 서덜랜드가 [24] 덕분에 배우로서 최고의 전성기를 맞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전 세계적인 인기를 누린 작품이기도 하다. 포맷 측면에서 [24]의 가장 큰 특징은 하루 동안 발생한 사건들을 실시간으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만큼 스토리가 긴장감 있게 빠르게 전개된다는 게 장점이나, 후반 시즌으로 갈수록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서덜랜드가 출연료 협상 결렬 및 나이를 이유로 하차한 후 스핀오프인 [24: 레거시]가 방영됐지만 당연히 오리지널만큼 흥행하지는 못했다. 마지막 시즌 8을 제외한 모든 시즌과 [24: 레거시]를 감상할 수 있다.

스테이션 19 (Station 19, 2018-)

이미지: 디즈니 플러스

[그레이 아나토미]의 스핀오프 [스테이션 19]는 병원이 아닌 시애틀 19번 소방서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다룬다. [그레이 아나토미]의 마취과 의사 겸 외과 레지던트였던 벤 워렌이 소방관으로 이직한 후의 이야기이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인명 구조에 목숨을 거는 소방관들의 업무 및 사생활 등 다양한 인간관계를 보여준다. ‘영원한 그레이’ 엘렌 폼페오를 비롯해 [그레이 아나토미]의 배우들이 첫 시즌부터 특별 출연하며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 준 점도 눈길을 끈다. 올해 9월 시즌 5까지 방영됐는데도 한국 디즈니 플러스에서는 아직 시즌 2까지만 볼 수 있는 것이 유일한 단점이다.

위기의 주부들 (Desperate Housewives, 2004-2012)

이미지: 디즈니 플러스

ABC의 수많은 명작 중에서도 [위기의 주부들]은 K-드라마와 쌍벽을 이루는 대표적인 막장 미드로 유명하다. 시즌 1 첫 화부터 극중 ‘주부들’의 일원인 메리가 자살하고, 이후 기존 주부들과 새로 이사 온 여인들이 친해지거나 반목하면서 갖가지 불행과 악이 위스테리아 가를 맴도는 것이 주요 스토리다. 이 복잡한 요지경 속에서도 메리의 남은 친구들은 제목 그대로 필사적인(desperate) 노력을 쏟아 우정과 가족을 어떻게든 유지한다. 그 과정에서 사람이 툭하면 죽어 나가고 배우자나 애인이 숱하게 바뀌지만, 시청하다 보면 자연히 그러려니(?) 하게 된다. 어쨌거나 [위기의 주부들]은 에미상, 골든 글로브 등 각종 시상식을 수차례 휩쓸며 [섹스 앤 더 시티]와 더불어 여성 서사 드라마의 전당에 올랐다. 출연진의 불화 등 우여곡절 끝에 시즌 8으로 종영했는데 한국 디즈니 플러스에는 아쉽게도 시즌 6까지만 올라와 있다.

헬스트롬 (Helstrom, 2020)

이미지: 디즈니 플러스

2020년 훌루가 공개한 [헬스트롬]은 마블 코믹스가 원작임에도 특이하게 프로모션이나 예고편에서 마블 관련 언급이나 이스터에그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때문에 [미즈 마블], [쉬헐크], [문나이트] 등 디즈니 플러스의 차기 MCU 시리즈와는 아예 별도의 노선을 걷는 작품으로 보는 게 정확할 듯하다. 초능력을 가진 데이먼과 아나 헬스트롬 남매가 가족 문제와 사악한 어둠의 세력을 한꺼번에 맞아 치열하게 싸우는 이야기이며, 원작에서 두 남매의 아버지가 악마인 것과 달리 [헬스트롬]에서는 아버지가 연쇄살인범으로 등장한다. 시즌 1 방영 후 기대에 못 미치는 평가를 받으며 캔슬된 비운의 작품이지만 [데어 데블], [퍼니셔], [제시카 존스] 등 넷플릭스의 어두운 마블 시리즈들을 애청했다면 이 작품에게 마음을 줄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