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신동욱

이미지: 영화사 진진

[뉴욕 라이브러리에서 Ex Libris : New Yoork Public Library]는 뉴욕 공립도서관에서 진행중인 한 강의 또는 대담으로부터 단도직입으로 시작한다. 공간이 곧 영화 제목인 작명 센스는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시티 홀 City Hall](2020)은 보스턴 시청 이야기다. [내셔널 갤러리 National Gallery](2014)는 영국 런던 소재 국립 미술관을 다룬 작품이다. 버클리 대학교로 카메라를 들고 들어가 만든 작품 제목도 [버클리에서 At Berkeley](2013)다. 작명이 늘 이런 식이기 때문에 [뉴욕 라이브러리에서]를 보는 감상자는 이번엔 왜 뉴욕이며 하필 도서관인지 영화 제목부터 살피게 된다.

제목 그대로, 있는 그대로

이유가 있다. 작품을 다 보고 나면 정직한 제목이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다. 물론 다각적이고 입체적인 접근을 보여주지만 한편으론 꽃병을 그려 놓고 ‘꽃병’이라 이름 붙인 정물화가 떠오르는 수준이다. 내레이션을 쓰지 않고, 음악도 영화에 개입시키지 않는다. 인터뷰도 안 한다. 감독 프레더릭 와이즈먼은 늘 그랬다. 철저히 공간과 공간 속 사람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그래서 감독의 개입을 최소화하는 다큐멘터리 영화 사조 중 하나인 이른바 ‘다이렉트 시네마’의 기수로 프레더릭 와이즈먼이 손꼽힌다. 프레데릭 와이즈먼은 꾸준히 공공 영역, 그 중에서도 공공기관에 늘 관심을 두고 작품을 만들어왔다.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도서관인 데다 각종 지식이 집약돼 있으니, 프레데릭 와이즈먼 레이더에 뉴욕 도서관이 포착될 수 있었음은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감독은 장면 배치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프레데릭 와이즈먼은 뉴욕 도서관에서 반복되는 강연 또는 포럼, 직원 회의 장면과 각종 행사 등을 촬영해 시퀀스를 구성하고 편집해 병렬적으로 열거한 다음, [뉴욕 라이브러리]를 세상에 내놓았다. 드라마틱한 극적 전개와 거리가 먼 영화다. 일반 관객 입장에서는 ‘뉴욕 도서관에 파편처럼 흩어져 있는 시간들을 모아 붙인 것 같은 이 영화 어디를 계속 보라고 ‘FRIEND’ 철자도 모르는 아이들 받아쓰기 공부하는 장면까지 붙여 놓은 걸까’ 싶을 수 있다. 그저 서사만을 무심하게 살피자면 [뉴욕 라이브러리에서]는 전에 많은 다큐멘터리 영화들이 뒤집어 썼던 오명 또는 편견을 강화하는 데 그칠 것이다.

다만, 필자는 감상자가 능동적인 자세를 취할수록 영화도 딱 그만큼을 보여줄 것이라고 얘기하고 싶다. 영화가 성에 차지 않고 평범하지 않을수록 구성과 형식을 살펴야 한다. 이유 없는 영화는 없다. [뉴욕 라이브러리에서]에서 프레데릭 와이즈먼은 ‘이성과 과학을 위한 리처드 도킨스 재단에 관한 담론’을 영화의 제일 처음 시퀀스로 배치했다. 가장 먼저 마이크를 잡은 리처드 도킨스는 명저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이면서 유명한 무신론자. [뉴욕 라이브러리에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영화의 제일 처음에 등장한 그의 말을 아래에 조금 옮긴다.

이성과 과학을 위한 ‘리처드 도킨스 재단’은 경각심을 일깨우려고 노력하죠.
미국엔 무신론자가 훨씬 많다는 걸 말입니다.
정치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이요.
TV에서 정치인들이 말하는 걸 보면 종교 단체에 굽신하고 무신론자는 안중에도 없죠.
미국의 주류 종교만큼 최소 20% 이상인데 목소리를 안 높이니 무시당하는 거예요.

이미지: PBS

알려진 바 [뉴욕 라이브러리에서]의 촬영 분량은 9000분이다. 프레데릭 와이즈먼은 이 9000분 중에 250분을 추려내 1차 편집본을 만들고, 다시 40분을 덜어내 [뉴욕 라이브러리에서]를 완성시켰다. “감독은 영화 속 편집과 모든 장면 배치에 대해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감독 지론만큼이나 대단한 이 방대한 작업에서 프레데릭 와이즈먼이 영화의 가장 앞에다가 세운 사람이 리처드 도킨스인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이 영화가 가장 먼저 이야기하고 싶은 말을 리처드 도킨스의 마이크를 빌려 프레데릭 와이즈먼이 하고 있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프레데릭 와이즈먼은 리처드 도킨스의 강연 위로 청중들의 표정을 교차하고 있다. 그가 영화에서 지식 그 자체만큼 그것이 전달되는 과정에도 많은 중심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리처드 도킨스 덕분에 감상자는 이 영화가 세계를 상식에 기반해 바라보려는 작품이고, 참된 지식이 도서관을 통해 민주적이고 자유롭게 퍼져 나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영화라는 사실을 좀 더 쉽게 알 수 있다. 요컨대 시간 순도 아니고, 아무거나 이은 것은 더욱 아니다. 영화가 “사실에 기반한 지식들과 성숙한 민주주의”를 주제로 다루면서 영화 개봉 당시 대통령으로 선출된 미국 대통령의 이념과 정책들이 비평에 함께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뉴욕 라이브러리에서]가 도널드 트럼프를 비판한 영화 아니냐는 평가들이었다.

말이 많은 ‘뉴욕 라이브러리에서’

이미지: 영화사 진진

[뉴욕 라이브러리에서]는 ‘말 많은 도서관’ 이야기다. 도서관이 이렇게 수다스럽고 말들로 꽉 채워진 공간이었나 생각해보면 우리나라 도서관 풍경과 사뭇 다르기도 하다. 대부분 혼자 앉아서 조용히 책을 읽거나 시험 공부하기가 흔한 도서관 열람실 모습인데. 다같이 둘러 앉아 서로의 지식을 공유하고 토론하는 분위기가 새삼 부럽다. 영화에서 도서관은 단순한 도서 열람의 기능을 넘어선다. 사람들이 모여 공간을 채우고, 도시 문화를 선도하는 문화 시설이 ‘뉴욕 라이브러리’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마치 여행 영화 한 편을 본 듯, 자연스럽게 뉴욕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든다.

다큐멘터리 감상이 어려운 영화 팬들에게

이미지: 영화사 진진

다큐멘터리 영화를 안 보는 이유를 주변에 물어볼 때가 있다. 대개 다큐멘터리 영화가 주제 의식이 선명하거나, 특정한 대상에 비판적 시각을 유지하고 있어 불편하다는 대답들이 돌아온다. 서사를 통제하기 어려워 극영화만큼 재미있지 않다는 평가도 있다. [뉴욕 라이브러리에서]는 이런 경우에 추천하는 수준 높은 다큐멘터리 영화다. 다만 영화가 기승전결을 갖췄기를 기대하기보다, 각각의 장면들에서 감독이 말하려 하는 바 또는 감독의 관심사를 찾아볼 것을 추천한다.

욕심을 부리자면 [뉴욕 라이브러리에서] 한 편을 다 본 감상에 그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구해볼 수 있는 프레데릭 와이즈먼의 영화 중에선 [라 당스 La Danse], [티티컷 풍자극 Titicut Follies], [크레이지 호스 Crazy Horse]도 있다. 작품을 관통하는 공통점이 선명하기 때문에 감독의 개성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다. 여기까지 나아가면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는 시각이 전보다 훨씬 확장되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