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신동욱

이미지: Java Films

관객들이 [가자에 띄운 편지 Erasmus in Gaza](키아라 아베사니, 2021)를 재미있다고 느끼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영화의 서사 구조에 있다. 주인공 리카르도는 이탈리아 시에나 대학교 의과대학에 재학중인 학생이다. 응급외과 의사가 되기 위한 자질을 스스로 시험해보기 위해 교환 학생을 신청하는데, 그가 정한 행선지가 다른 곳도 아니고 가자 지구다. 스스로 의사가 될 수 있을지를 확인하기 위해 선택한 곳이 가자 지구라는 정보 속에서 관객들은 리카르도 스스로 가자 지구에서 불운한 사태가 진행 중이며, 부상자가 속출한다는 점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고 유추해볼 수 있다. 리카르도 자신이 각오가 되어 있었으리라 본다는 뜻이다. 또 영화가 보여주는 가자 지구의 일상은 물론 위태롭지만 치열한 교전지까지는 아니기 때문에, 관객들은 그가 공황에 빠지기 전까지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가자 지구에서 정해진 교환 학생 기간을 큰 탈 없이 마치리라 짐작할 수 있다. 정말 그럴까.

말 그대로 ‘뭣도 모르고 뛰어들었는데 알고 보니 전쟁터 한복판’이라는 식의 이야기는 많다. 우리나라로 치면 [변호인](양우석, 2013) 또는 [택시운전사](장훈, 2017) 같은 작품들이다. 고발 성격이 짙은 영화가 차용하기 좋은 서사 구조를 [가자에 띄운 편지] 역시 차용하고 있다. 익숙한 서사 구조는 감독이 전략적으로 채택하기만 했다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관객들은 편안하게 영화에 몰입해 감독과 주인공이 고발하려고 하는 대상이 무엇인지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다.

이미지: Java Films

수천 년 역사의 팔레스타인 분쟁사를 3000자 칼럼에 옮기기는 불가능하다. 간단히 요약해 팔레스타인은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의 경계라는 지정학적 특성과 그리스도교, 유대교, 이슬람교 모두에게 절대적 성지라는 종교적 특성으로 인해 지배 세력이 끊임없이 바뀌어 온 땅이다. 이 땅에 살던 민족이 떠났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하며 겨우 자리 잡은 터가 현재 사해를 끼고 있는 요르단강 서안 지구 일대, 그리고 가자 지구이다. 이곳 만이라도 안전을 보장할 수 있으면 좋은데 지역 사정이 또 마음 같지 않아서, 심심하면 미사일이 푹 하고 떨어져 건물 하나 예사로 없애 버린다. 집주인이 돌아왔는데 다시 나가라는 세입자의 무력 시위다.

세계대전 당시 유럽에 살던 유대인들은 홀로코스트를 피해 이 지역으로 왔다. 유대인들은 이곳에 국가를 만들어 정착하기 위해 국제 사회의 동의를 구했다. 특히 독일 같은 경우엔 이스라엘 국가 수립에 가장 적극적인 국가 중 하나였다. 인종 대학살 역사에 대한 면죄부를 값싸게 얻으려 한 셈이다. 간단하게 쓰려고 해도 사정이 이만큼 복잡하다 보니, 이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영토 분쟁이라 하기도 어렵다. 이들 분쟁사를 뭐라고 부르든 그보다 더 큰 문제는 그곳에 터전을 자리잡은 지역 주민들이다. 갈 곳은 없고, 미사일을 맞고 있자니 억울해 귀환 행진 대열에 들어갔다 가는 총에 맞을 수도 있다. 가자 지구에 도착한 리카르도의 시선을 빌려 영화는 이곳 인권이 무너지고 있음을 고발한다.

이미지: Java Films

그런데 꼭 영화가 가자 지구의 참상만을 보여주는 작품은 아니다. 리카르도 접경 지역으로 덩달아 가자 지구에 도착한 카메라는 리카르도를 구실 삼아 지역민들과 전쟁 상흔을 번갈아 바쁘게 보여주는 중간 틈틈이 리카르도의 얼굴을 클로즈업한다. 고발성도 짙지만 영화는 기본적으로 인물을 중심으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다. 가자 지구로 떠나기 직전까지 호기 넘치던 주인공의 표정에는 영화가 진행될수록 점점 미사일 모양 그림자가 드리운다.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집에 가고 싶어. 여긴 위험한 상황에서도 침착한 분위기야”라며 가자 지구에서의 생활에 근본적으로 회의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이미지: Java Films

그러다 처음 한 번의 대피 소동 끝에, 리카르도는 자신이 흔치 않은 기회 속에 있음을 깨닫는다. 자신이 스스로의 인생에서 바라는 것을 가자 지구에서 찾겠다는 초심을 되찾는다. 이때부터 리카르도의 행동에는 거침이 없다. 강력한 권고에 따라 몸을 피했던 베들레헴에서 다시 학교로 돌아와, 원하는 것을 얻어가겠다며 현지의 또래 여성에게 접촉한다. 이는 그가 교환 학생으로 처음 가자 지구에 도착했을 당시 학교로부터 받은 몇 개 안 되는 금지 조항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러나 리카르도는 이 여성을 통해 그의 손길이 필요한 병원으로 활동 반경을 넓힐 수 있게 된다. 의과 대학생이 갑자기 실력을 발휘하며 의사보다 많은 생명을 구하는 극적인 결말 같은 것은 없지만, [가자에 띄운 편지]는 제목에 생략된 주어가 스스로 나아가는 과정을 잘 포함하고 있다. 한 인물이 성장하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영화가 전달하는 메시지는 “가자 지구에 인권 붕괴가 만연하다”를 넘어서, 도전을 통해 주체적인 삶을 쟁취하려는 인물에까지 나아가는 데 성공한다.

리카르도는 처음 본 사람과도 한 10년 차 절친 바이브를 보여줄 정도로 친화력이 좋다. 덕분에 영화는 가자 지구의 일상까지도 따뜻하게 담을 수 있었다. 물론 가자 지구는 공동체가 붕괴한 곳이지만, 리카르도를 중심으로 한 대학과 병원은 연대 의식을 복원할 만한 희망을 보여준다. 이만하면 리카르도를 주인공으로 섭외한 감독의 선택은 대성공이다.

이미지: Java Films

지난 8월 28일 폐막한 EBS 국제다큐영화제(이하 EIDF)는 [가자에 띄운 편지] 외에도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전개 중인 투쟁 현장을 담은 소중한 다큐멘터리 영화들을 소개했다. 영화제는 끝났지만 [가자에 띄운 편지]를 소개하는 이 칼럼은 아직 유효하다. 다행히 EIDF는 자체 VOD 서비스인 D-BOX를 통해 올해 초청작들 다수를 공개하고 있다. [가자에 띄운 편지]는 물론, 글로벌 경쟁 부문 대상작 [넬리와 나딘 Nelly & Nadine](마그누스 게르텐, 2022)과 [사라지는 유목민 The Fading Nomads](웨이성저, 2021), 심사위원특별상 수상작인 [제이슨 Jason](마샤 옴스, 2021)과 [베이루트 : 폭풍의 눈 Beirut : Eye of the Storm](마이 마스리, 2021) 등 영화제 상영작 중에서도 특히 작품성을 인정받은 작품들도 있다. 다만 언제 내려가는지 모르니 나도 여유 부릴 때가 아니다. 한 편이라도 더 보려면 일단 서두르는 게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