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동기

이미지: CJ ENM

잘 무너지기 위해선 우선 잘 쌓아 올려져야 한다. 곱게 쌓아 올린 그것의 위상을 바라보며 탄탄하게 다져진 밑바닥을 만지고 나면, 그 기반이 어느새 든든한 벽이 되고 시선의 높낮이가 달라진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 그러니까 여기서 쌓아 올려진다는 건, 마치 내려다볼 수 있는 깊이를 느끼는 것과 같다. 그래서 잘 무너지기 위해선 우선 잘 쌓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무엇을 쌓아야 하는지, 어떻게 쌓아야 하는지, 그리고 왜 무너져야 하는지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무너지는 게 익숙해질 때 비로소 그 행위를 깊이 이해하게 된다. 무너진다는 건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할 일이다.

영화 [헤어질 결심](2022)은 흡사 잘 빚어진 조각처럼 곱게 쌓아 올린 하나의 형상이 아름답게 무너지는 그런 모습을 비추는 영화이다. 이는 우리가 흔히 화면에서 느끼게 되는 특별한 메시지를 담아낸 형상과는 좀 다르다. 오히려 그보다 좀 더 심층적이고 체계적이며 한편으로 구체적이면서도 또렷하기까지 하다. 해준(박해일 분)이 보여준 서래(탕웨이 분)를 바라보는 시선 말이다. 아마도 이건 ‘사랑’의 감정과는 또 다른 영역에 해당할 것만 같다. 그는 분명 그를 두고 구체적으로 ‘사랑’을 언급하진 않았다. 하지만 서래가 받아들인 감정은 곱게 쌓아 올려진 그것처럼 내면에서부터 ‘사랑’을 구체화하는 모습이다. 이 감정은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조차 헷갈리게 만든다.

해준과 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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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 감독은 이런 스타일의 표현과 풀이를 즐긴다. 영화 [복수는 나의 것](2002)에서도 선과 악의 경계를 뒤섞어 그 해답을 정의하려는 이들의 판단을 흐리게 한 바 있다. 영화 [올드보이](2003)나 [친절한 금자씨](2005)에서도 그 해법이 유사하다. 구체적으로 드러난 선과 악의 민낯이 분명한데도 누구 하나 이를 직접적으로 건드리지 못한다. 이 영화 [헤어질 결심]도 이러한 과정을 선호한다. 해준이 운전하던 도중 졸음을 쫓지 못하고 사고가 날뻔한 그 순간도 그렇다. 잠복근무로 인해 잠이 부족한 게 아니라 잠이 안 와서 잠복을 하는 거라는 변명. 이는 해준이 앞으로 겪게 될 사건이 결과가 흐트러지는 것에 대한 복선으로 나타나는 부분이 된다.

사건, 안개, 취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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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도수(유승목 분)의 사고를 좇는 대목에서 해준이 산의 정상에 올라섰을 때 죽은 도수의 눈동자, 즉 반대 상황에 놓인 자의 시선으로 자신을 비추는 연출을 맛볼 수 있다. 이조차 사건을 거꾸로 읽게 만드는 아주 재미난 연출이다. 여기에 가수 정훈희의 ‘안개’는 사건의 초점을 흐리게 만드는 단순한 기제로만 작용하고 있지 않다. 돌려 말하면, 서래 스스로 이 사건에 대한 풀이를 ‘안개’라는 제목을 통해 거꾸로 제시하고 있다는 얘기다. 결국 사건을 풀어가는 해준의 입장에서는 역할이 뒤바뀌고 원인과 결과가 바뀐 상황을 대변하고 있는 꼴을 드러내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이 지점이 바로 그를 찾아온 서래의 행동에서부터 시작하고 있으니 말이다. 오히려 취조를 당하는 건 서래가 아닌 해준이라는 거다.

미결 그리고 마침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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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결로 남은 사건의 사진을 벽에서 우연히 발견한 그는 자신과 관련한 흔적을 하나씩 빠르게 지워나간다. 핸드폰에 남아있던 녹음파일마저도 서래는 해준에게 접근한 목적을 애초부터 드러내듯 너무나 순수한 손짓으로 서슴없이 그의 곁을 파고들 줄 안다. 거친 손을 만지며 그에게 핸드크림을 발라주는 두 사람의 손이 함께 교차하는 장면. 그 순간 해준과 달리 그의 손가락에 눈에 익숙한 반지가 보이지 않는다. 지금껏 관객이 끌고 온 사건의 방향에 대한 단서가 마구 붕괴하는 순간이다. 그리고 이때부터 영화는 이야기의 주제를 담아낸 ‘마침내’라는 단어를 본격적으로 꺼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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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익숙한 ‘결국엔, 드디어’의 뜻을 가진 이 말은, 종국에 이르러 이해해야 할 것을 이해하게 됐고, 사라져야 할 것을 사라지게 했다는 방향으로 해석을 단정 짓게 만든다. 사건이 머물러야 할 곳, 혹은 이뤄져야 할 것이 결국 행해진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새로운 의미가 화면에 형성되는 이 시점은 서래가 가진 미스터리의 결말이 어떤 진실을 담고 있는지를 꽤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단어로 사용된다. 첫 번째 사건의 취조 과정에서 두 사람의 배경에 거울이 적절하게 배치된 것도 그렇다. 대개는 다른 내면을 돌려 구체화하는 하나의 도구로 여겨지는 이것이 여기서는 두 사람의 현재와 미래를 구분하는 경계의 그것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취조실부터 시작된 해준과 서래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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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래가 산보다 바다가 좋다고 말할 때 해준이 ‘나도’라고 짧게 내뱉는 것도 두 사람의 결말을 암시하는 부분이겠다. 언어로 쉽게 소통하기 어려웠던 둘의 관계가 그 경계를 해체하는 행위로 남게 되는 순간이어서다. 영화는 서래가 한국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순간을 그의 웃음을 통해 관객에게 간접적으로 제시한다. 반복된 그의 웃음이 이후에는 독특한 기시감으로 작용해 그 의미의 폭을 확장하는 측면도 있다는 생각이다. 초밥으로 식사를 하고 양치까지 마무리한 후 다시 취조실로 들어서는 그의 손가락에 이전까지 비어있던 반지가 다시 등장한다. 지금껏 자신이 풀어낸 이야기의 진실과 거짓에 대한 경계를 보이는 부분이 아닐 수 없겠다. 방향은 한번 정해지면 그 틀을 쉽게 바꾸지 않는다. 서래도 그러했던 거다.

인공눈물을 넣는 해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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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단이 흐려질 때마다 해준이 눈에 넣는 인공눈물. 건조한 눈에 습기를 채워주는 이 행위는 어두운 현상을 이해하고 파악하려는 그의 시선을 맑게 만들기 위함이지만, 행위가 반복될수록 ‘서래’라는 틀에 빠져버리는 자신의 모습을 돌려 표현하는 것과 같다. 이포에서 두 번째 남편의 시체를 발견했을 때 해준은 다시금 과거로 회귀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인다. 어찌 보면 반갑게 시작된 살인사건의 중심에는 그가 사건을 해결하고자 노력하는 행위가 있고, 한편으로 다시 그에게 돌아갈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행위도 존재한다. 이 행위는 서래의 행동과 연결되어 그와 자연스레 이어지는 일종의 화면적 기시감을 연출하기도 한다. 이 기시감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누구나 이끌 수 있는 공감대를 형성하는 좋은 틀이 된다.

끝으로… 내가 그렇게 만만합니까?에 대한 서래의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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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렇게 만만하냐”는 해준의 질문에 “내가 그렇게 나쁘냐”고 되묻는 그의 대답. 그를 대신해 유골가루를 산에 뿌리는 해준의 뒤로 그의 표정이 라이트를 통해 교묘히 감춰진다. 해준의 미결사건으로 남고자 이포에 온 것 같다고 얘기하는 그의 말은 영화의 제목과 이어지며 지금까지 꽁꽁 묶어왔던 두 사람의 감정을 완벽하게 풀어놓는다. 곱게 쌓아 올린 아름다운 모래성은 잔잔한 파도에도 아름답게 무너질 줄 안다. 우리가 이를 ‘사랑’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지 몰라도, 적어도 해준과 서래가 보여준 감정이 서로의 시간과 공간의 그것을 잘 헤쳐놓았다면, 아마도 우리는 이들을 ‘사랑’으로 묘사할 수 있을 것 같다. 무너지는 걸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이는 ‘마침내’ 사랑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