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신동욱

이미지: BAC Films

자연 생태 다큐멘터리 영화의 고전 명작으로 손꼽히는 [마이크로 코스모스 Microcosmos](클로드 누리드샤니, 마리 페레노, 1996)의 오프닝 시퀀스는 하늘에서부터 시작해 땅으로 들어와 초원에서 끝난다. 지구 전체를 조망하던 시각이 일순간 좁아지는 시각적 체험은 영화가 씬 하나를 구성할 때 가장 흔히 사용하는 연출이라 크게 새삼스러울 것은 없다. 독자들께서 좋아하는 영화 대부분이 이야기를 시작할 때, 주인공이 속한 공간이나 배경부터 묘사하면서 자연스럽게 인물로 들어가지 않았던가. 하지만 기왕에 초원에 사는 생명체들에 집중하기로 기획했을 [마이크로 코스모스]가 땅이 아닌 하늘에서부터 영화를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이 오프닝 시퀀스를 한 번은 의심해봐야 한다. 감독이 오프닝 시퀀스를 통해 관객들에게 어떤 효과를 전달하고 싶었을지를 말이다. 오프닝 시퀀스는 영화를 소개하는 성격을 가진다. [라라랜드 LaLaLand](데미안 셔젤, 2016)가 오프닝 시퀀스 그대로 뮤지컬 영화였던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마이크로 코스모스]가 단순히 자연 생태 다큐멘터리인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땅에 살면서도 주목하지 못하고 있었던 땅의 세계를 줌 인 zoom in 해 보여주는 영화라고 오프닝 시퀀스에서부터 극단적으로 표현하며 예고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벌레를 무서워하는 사람도 푹 빠질 다큐멘터리 ‘마이크로 코스모스’

이미지: BAC Films

그러나 나는 벌레를 우리 어머니보다 무서워하기 때문에 [마이크로 코스모스]를 끝까지 볼 수 있으리라 처음부터 여겼던 것은 아니다. 또한 생태 다큐멘터리 영화는 관객들에게 익숙한 서사를 충분히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가 많고, 대체로 여러 자연 현상을 나열식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크게 흥미를 갖지 못하는 영화 팬들도 많다. 물론 나도 생태 다큐멘터리보다는 저널리즘 다큐멘터리처럼 사회에 강하게 참여하고 있는 작품에 좀 더 익숙하다. 그래도 [마이크로 코스모스]를 킥킥거리다 감탄하다 하며 재밌게 볼 수 있는 이유는,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아주 특별한 연출 전략에 있다. 영화는 우선 하나의 생명체에 반드시 완결된 하나의 에피소드를 완성한다. 자연이라는 대서사가 있고 그 속에 작은 서사들을 이어 보여주다 보니 75분 남짓 짧은 러닝타임이 훌쩍 지나가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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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시퀀스들이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그 중 쇠똥구리가 가장 압권이다. 쇠똥구리가 신나게 진흙을 굴리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눈덩이처럼 불어나던 진흙은 땅에 박혀 있던 나뭇가지에 그만 푹 박혀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 돼 버리는데, 이 순간부터 관객들은 쇠똥구리가 이 난관을 어떻게 극복할지를 흥미로운 눈으로 지켜보게 된다. 안타깝게도 쇠똥구리가 그리 영리하지는 못한 모양인지, 처음엔 힘으로 극복하려고 아등바등한다. 벌레가 정말 무섭지만 이 장면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로 귀엽다. 한마음으로 쇠똥구리를 응원하게 된다. 반대쪽으로 옮겨 가서 진흙을 빼낸 다음에 나뭇가지를 피해 다시 가라고 온 마음으로 기도하는 심정이다. 한참을 끙끙 앓던 쇠똥구리가 드디어 해법을 찾아 다시 여정을 시작하면 그 모습이 기특해 뽀뽀가 마렵다. 이때 카메라의 움직임이 정말 기발하다. 카메라는 이 모습을 롱 샷으로 줌 아웃 zoom out 하며 보여준다. 실로 ‘쇠똥구리의 쉽지 않은 하루’라 제목 붙여 단편 다큐멘터리 영화 한 편으로 내놓아도 손색없는 컷 구성이다. 또 우리가 들여다보고 있던 쇠똥구리가 실로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카메라다. ‘19금’ 달팽이 시퀀스도 마찬가지다. 하는 걔들 말고, 보는 내가 다 황홀할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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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의 생명체가 보여주는 이들 에피소드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요소는 사운드다. [마이크로 코스모스]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영화를 본 이들이 가장 많이 언급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영상미일 수밖에 없는 것 같지만, 그래도 이 영화의 사운드를 살피지 않은 감상은 확실히 무언가 중요한 하나를 놓치고 있는 느낌이다. 앞서 언급한 ‘19금 달팽이 시퀀스’를 더욱 야하게 보이도록 하는 건 화면보다 음악이다. 달팽이 두 마리가 서로 몸통을 비비는 장면에 나오는 음악이 정말 우아하다. 다 이런 식이다. 감독은 이들 장면에 적절한 효과음 또는 음악을 배치해 자신이 느끼는 정서를 그대로 관객들에게 전달하려고 한다. 다큐멘터리 영화로서는 보기 드물게 OST가 발매됐을 정도다. 그러면 관객들은 대번에 이 장면이 어떤 장면인지, 장면 연출 의도는 무엇인지를 알아차리게 된다. 그래서 [마이크로 코스모스]에는 생태 다큐멘터리에서 흔하게 사용하는 설명적 내레이션도 없다. 효과음과 음악으로 장면을 모두 설명할 수 있으니 굳이 내레이션이 깊숙이 개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똑똑한 연출이다.

‘마이크로 코스모스’를 흥미롭게 봤다면 이 작품도 추천! ‘물의 기억’

이미지: 롯데엔터테인먼트

여기까지 읽으며 [마이크로 코스모스]에 흥미를 가지게 된 영화 팬이라면 꼭 추천해주고 싶은 다큐멘터리 영화가 한 편 있다. 지역 민방에서 최초로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 [물의 기억](진재운, 2019)이다. [물의 기억]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퇴임 후 고향인 경남 김해 봉하마을에서 일구려 했던 친환경 농법 이후 10년 동안 어떻게 생태계가 변화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노 전 대통령을 소재로 무수히 많은 다큐멘터리 영화가 제작됐지만 [물의 기억]만큼 차별화된 작품도 없다. 단적으로 이 영화가 인물 다큐가 아니라 생태 다큐라는 점만 봐도 그렇다. 이른 바 ‘노무현 다큐’를 양식적으로 확장해나간 [물의 기억]이, 바로 [마이크로 코스모스]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다. 진재운 감독 스스로 제작 과정에서 [마이크로 코스모스]를 생각했다 인터뷰를 통해 말했을 정도다. 노 전 대통령이 가진 정치적 자산과 이미지, 영웅 서사를 적극적으로 차용하지 않고 오히려 인물을 배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며 주목받았던 [물의 기억]이 [마이크로 코스모스]와는 어떻게 닮아 있으며 또 어떤 점이 다른지를 살펴보면, 자연 생태 다큐멘터리 영화를 관찰하는 시각이 확장하는 경험을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