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혜연

이미지: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니체가 신을 죽인 이유는 인간이 구원만을 바라며 일상을 소외시킬 것에 대한 염려 혹은 경고였으리라. 나는 그 경고에 유의하며 살아왔나 생각해 보니, 섬광처럼 빛나는 찰나를 위해 일상을 희생시킨 기억들이 떠오른다. 아직 미완성이니, 태어난 것도 아니라 생각했던 걸까. 불꽃을 찾았다고 여기며 단 한 가지 목적에 미친 듯이 몰입하던 그 시절, 하지만 정작 나에게 나를 위한 일상은 없었다. “왜 그렇게 열심히 사니?”라는 걱정스러운 물음에 담긴 의미를 몰랐고, 어쩌면 다잡은 마음이 흐트러질까 봐 외면하기도 했다. 다행히 생애 한 번뿐이었을지 모를 그 시절의 치열함, 뜨거움, 솟구치던 이름 모를 감정들이 이제 와서 부끄럽지는 않다. 후회는 의미가 없고, 자책은 어리석으니 다만 수고했다는 말을 해주고 싶을 뿐이다.

삶은 그 자체로 덫일 수도, 강물일 수도 있다. 불꽃은 존재할 수도 있고, 허상일 수도 있다. 경계에 선 영혼은 길 잃은 미아일 수도, 거대한 가능성일 수도 있다. 그냥 태어나버린 나에게서 의미를 찾는 일은 무의미하기도, 고귀하기도 하다. 음미하지 못하는 인생은 살 가치가 없지만, 음미해 버린 인생은 매력이 없다는 말처럼. 그래서 동일한 것을 영원히 반복하는 ‘영원회귀’ 사상은 희망이고, 절망이다. 좋은 것만이 좋은 것이라고 여기는 우리에게, 픽사 애니메이션 [소울]은 “삶의 모든 순간을 받아들여라”라고 말한다. 몇 세기 이전의 철학자가 남기고 간 그 메시지와 일치한다. 몇 백 년 전의 말을 왜 또 반복할까? 닳고 닳은 진리에도 귀 기울일 여유 없는 우리를 위한 다정함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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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을 기다리는 영혼들이 모여 있는 ‘태어나기 전 세상’에는 상냥한 회의론자, 호기심 넘치는 낯가림쟁이, 남을 조종하는 기회주의자 등 각양각색 영혼들이 머무르고 있다. 이들은 각자의 멘토와 함께 자신의 관심사를 발견하며, 마지막 불꽃을 찾아내 지구로 향하려 한다. 이곳에는 유일하게 지구에 가고 싶어 하지 않는 시니컬한 영혼 ‘22’도 살고 있다. 무려 수천 년 동안이나 지구로 내려가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링컨, 간디, 테레사 수녀도 그의 멘토가 되기를 포기했으며, ‘모든 것의 전당’에는 세상 모든 것이 존재하지만 무엇 하나 그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새 영혼들에게는 지구가 얼마나 한심한 행성인지를 직접 일러 주기도 한다.

22가 이렇게까지 지구에 반감을 갖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아마 너무 많은 것을 미리 알아버렸기 때문 아니었을까. 철학도, 심리학도, 천문학도, 정치학도 섭렵했으니 지구가 시시했을 것이고, 무엇보다 태어나기 전에 죽음을 먼저 알아버렸으니 허무했을 것이다. 대단한 삶을 살았던 위인들조차 영혼으로 돌아오고 만다는 사실을, 블랙홀처럼 끝없는 영혼의 세상과 달리 육체에는 수명이 있다는 사실을 차라리 몰랐다면 더 행복했을지도 모르겠다. 살아보기도 전에 삶을 깨우친 22에게는 굳이 태어나야 할 이유가 없다. 선과 면으로 이루어진 2차원 세계에서는 그의 말이 옳다. 그러나 2차원 세계를 벗어난 적이 없기 때문에,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의 다름을 알지 못했다. 22가 몰랐던 한 가지는 삶의 감각과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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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과 느낌은 곧 소울이다. 그리고 재즈는 곧 소울이다. “나가서 즉흥 연주를 하고, 위험을 감수해 보고, 완벽주의자가 되려 하지 마세요” 재즈 전성기를 누렸던 거장이 재즈를 설명하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변칙적이고 자유로운 재즈는 애초에 완벽함이 목적인 음악이 아니다. 그 순간에만 느낄 수 있는 흥겨움, 그곳에 있는 사람만이 취할 수 있는 자아도취 상태가 재즈의 목적에 훨씬 가까울 것이다. [소울]의 또 다른 주인공 조 가드너는 무명의 재즈 피아니스트로, 재즈를 곧 자신이 태어난 이유라 여긴다. 22가 왠지 모르게 오글거린다고 말했던 재즈가 조의 불꽃인 것이다. 그는 불안정한 직업을 유지하면서, 사랑하는 가족과 충돌하면서, 언제 올지 모를 기회를 기다리면서 꿈을 향해 달려간다. 그렇기에 삶이 간절했던 조는 태어나야 할 이유가 없는 22를 데리고, 일종의 지구 체험 학습을 펼친다.

조의 몸을 빌린 22는 트롬본 연주를 좋아하는 아이, 수의사를 꿈꿨지만 현재의 삶에 만족하는 이발사, 양복을 챙겨주는 어머니를 만나며, 생애 처음 사람과의 관계를 맺어본다. 태어나기 전 세상에서도 먹어 봤을 피자를 먹으며 처음으로 ‘맛’을 음미하고, 지하철에서 만난 이름 없는 음악가의 노래에 반하기도 한다. 스스로를 ‘재징’하다고 표현할 만큼, 어느새 삶의 감각에 흠뻑 젖게 된 것이다.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거나, 지하철에서 타인과 부딪히는 일 또한 오직 지구에서만 가능하다는 것도 배운다. 22가 감각의 즐거움을 알아갈 때, 고양이가 된 조는 내리쬐는 햇살에 몸을 맡긴다. 일상과 섬광이 교차하는 순간, 풍요로움이 별거 아니구나 싶어진다. 지구에 대한 모든 것을 알면서도 처음부터 다시 음미하는 22처럼, 우리도 조금 더 재즈스러워져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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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 준비가 되면 알아서 채워진다는 지구 통행증을 우리는 모두 획득한 셈이다. 그럼에도 다른 세계, 다른 삶 혹은 진짜 삶의 의미 같은 것들을 묻고 또 묻는다. 길을 잃었다는 이유로 자신을 자책하고, 존재하지도 않는 삶의 목적을 찾기 위해 방황한다. 바다에 살면서 바다를 모른다고 말하는 어린 물고기들 같다. 그러나 이제는 ‘무엇이 될 것이냐’는 그 무거운 물음에 그만 짓눌려도 되지 않을까.

내가 아무것도 되지 않겠다고 선언했을 때도, 계절은 유유히 흘러갔다. 시간이 멈추거나 세상이 나를 책망하지 않았으므로, 이대로도 충분하지 않겠나 싶었다. 그때부터 소외시켰던 일상과 친해지기 위해, 무한히 반복되는 현재를 긍정하기 위해 애썼다. 여기가 바다라는 사실이 의심될 때마다 걸었다. 눈 내리지 않는 겨울과 벚꽃 없는 봄을 상상하니 조금 서글프다. 더 자주, 길을 걸어야겠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흐르고 있어서 가치를 몰랐던 일상의 놀라움들을 응시해야겠다. 번쩍이는 섬광만을 좇던 나는 이제서야 하나의 인생이 하나의 섬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