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신동욱

다큐멘터리 팬을 들뜨게 하는 양영희 감독의 신작 ‘수프와 이데올로기’

이미지: (주)엣나인필름

[수프와 이데올로기](양영희, 2022)는 감독의 내레이션으로 작품의 포문을 연다. 오빠에 대한 이야기다. 내레이션은 오빠 셋이 북한으로 갔고, 그 중 하나가 평양에서 사망했다며 피붙이를 회상한다. 음악을 좋아하던 양영희 감독의 큰오빠는 김일성에게 충성을 맹세한 부모의 영향으로 일본에서 태어나 북한으로 떠났다. 그러나 양영희 감독의 내레이션에 따르면 건오 씨는 그곳에서 음악을 빼앗겼고, 장수하지 못했다. 누가 말하지 않으면 알기 어렵고, 당사자라면 굳이 입 밖으로 꺼내기에도 주저하게 될 것 같은 내밀한 가족사다.

양영희 감독은 이를 영상으로 기록해 사적 다큐멘터리를 완성한다. 최근 개봉한 [수프와 이데올로기]가 처음은 아니다. [디어 평양](2006)과 [굿바이 평양](2011) 등 감독의 가족사를 공적 영역으로 확대하며 꾸준하게 이어 온 디아스포라(diaspora) 영화, 또는 자이니치 영화를 다시 한 번 연장하는 작품이 [수프와 이데올로기]이다. 그래서 [수프와 이데올로기]를 제대로 감상하고 싶은 예비 관객들에게는 [디어 평양]과 [굿바이 평양]을 먼저 보길 추천한다. 특히 양영희 감독은 우리나라 다큐멘터리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이라면 한 번은 무조건 거쳐가게 돼 있는 이름이니 말이다.

이미지: 씨네콰논코리아

디아스포라(diaspora)는 문맥에 따라 여러가지 뜻을 가지는 단어인데, 검색 결과만을 옮겨 설명하자면 특정 민족이 자의 또는 타의로 살던 땅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여 형성한 집단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사적 다큐멘터리를 주로 만들어 온 양영희 감독의 작품들이 디아스포라 영화라고 지칭한 것은, 그의 가족들이 어딘가를 떠나와 삶의 터전을 새로 잡았다는 의미로 다가온다. 동시에 양영희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두고 자이니치 영화라고 설명하기 이전에, 감독의 가족이 떠나 온 곳이 한반도이며 새로 잡은 터전이 일본이라는 해석의 선행이 필요하다. 자이니치는 대체로 1945년 일본 패전 이전부터 일본에서 대를 이어 살아온 한반도 출신 재일(在日) 교포를 말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조국으로 돌아가지 않은 이들이다. 일본에서 태어난 양영희 감독의 부모 같은 이들이다. 따라서 어느 연구의 표현을 빌리면 재일조선인 1세인 부모에게 평양은 차별과 억압이 없는 인간적인 곳이고, 아들 가족이 살아야 하는 공간이다. 7살이 되던 해에 양영희 감독은 오빠들을 태운 북송선을 그렇게 배웅하게 됐다. 1959년부터 1984년까지 북한과 일본 정부가 합작한 이른바 ‘귀국 사업’ 또는 ‘북송 사업’의 일환이다.

수프 한 그릇에 풀리는 이데올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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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영희 감독 영화를 관통하는 갈등은 늘 여기서 발생한다. 재일조선인 2세, 즉 양영희 감독에게도 평양이 같은 의미를 가지는 공간이기를 바라는 재일조선인 1세의 바람은 다음 세대로 이어지지 않거니와 이어질 수도 없다. 재일조선인 2세에게 평양이란 정서적으로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어 3인칭으로 지칭 가능한 객관적인 도시이기 때문이다. 1세와 2세의 시선이 엇갈리며 발생하는 갈등이 양영희 감독 작품에 빠지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에서 풀리지 않는 갈등은 없다. 가족이 갈등을 서로 봉합하고 치유하는 과정이 양영희 감독 전작들, 그리고 신작인 [수프와 이데올로기]에까지 그대로 녹아 있다. [디어 평양]에서 연애도 결혼도 일본인과는 절대 안 된다며 단호하게 선을 그어버리던 감독의 모친은, [수프와 이데올로기]에서 양영희 감독이 집으로 초대한 일본인 남편에게 ‘수프(닭백숙)’를 만들어준다. 그리고 딸을 둔 여느 가정의 부모처럼 살갑게 남편을 맞이한다. 나이도 중요하지 않고, 두 사람의 마음만이 오로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들의 첫 만남이 지나가고 시퀀스를 거듭하면 감독의 남자친구가 혼자 이 수프를 만들고 있다. 서로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인 ‘수프’와 ‘이데올로기’를 붙여 제목으로 만든 감독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양영희 감독은 한 개인이 가지고 있던 절대 바뀌지 않을 것 같던 투철한 사상 또는 이데올로기가 세월에 깎이고 사랑에 녹으며 결국엔 수프로 간단히 와해되는 모습을 관객들로 하여금 지켜보도록 한다. 주제적인 관점에서는 사실상 영화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수프와 이데올로기]의 수프는 [미나리](리 아이작 정, 2021)에서의 미나리와 비슷한 의미를 가지는 장치로 영화 속에서 기능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평양에 유골을 가져가야 할 것이다.
그 방법을 나는 막연히 생각하곤 한다
이미지: (주)엣나인필름

[수프와 이데올로기]는 감독의 부친이 세상을 떠나 부재한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그의 모친이 가지고 있는 개인 서사에 집중한다. 놀라운 건 그의 부친과 마찬가지로 모친 역시 ‘디아스포라 자이니치’라는 점이다. 그리고 모친의 서사에는 제주 4.3 사건이 얽혀 있다. 일본에서 태어난 감독의 모친은 전쟁을 피해 제주도로 이주했지만, 눈앞에서 4.3 사건을 목격하게 된다. 모친은 다시 오사카행을 선택한다. 이후 모친은 4.3 사건의 기억을 좀처럼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다. 당시의 기억 속 제주가 너무 잔인해 잊어버렸다는 것이다. 죽은 자식의 시체를 끌고 와 다시 창으로 찌르는 모습을 본 모친의 삼촌은 눈알이 튀어나오도록 뒷통수를 맞고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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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를 외면해오던 모친은 자신을 찾아온 4.3 평화재단 관계자들에게 하나 둘 기억들을 털어놓는다. 그리고 그는 수십 년 만에 제주 땅을 밟는다. 굴곡진 근현대사에서 개인이 차마 정면으로 마주하기 어려웠던 상흔이 아주 조금씩 아물어가는 순간을 바라보는 것은 애잔하고 감동적이다. 놀랍게도 자신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면 어떻겠냐는 제작 제안 역시 모친이 먼저였다고 한다. 모친은 지나간 세월을 마주하고 용서할 준비를 마쳤던 것 같다. 그러나 영화관 문을 나서면, 개인의 비극과 아물지 못한 상처는 아랑곳없이 무심하게 반복되는 불행한 역사가 관객은 야속하고 미울 수밖에 없다. 세월에 기억이 깎여 나가며 귀국 사업 자체를 잊게 된 모친 앞으로 도착하는 북한발 편지 앞에 뭐라고 딱히 할 말이 있을까. 역사가 사람이라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