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풀잎피리

이미지: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워낙에도 유명한 작품을 워낙이나 유명한 감독이 맡아 영화로 만들었다. 오래 전이긴 하지만 이미 영화화된 적이 있는 작품인데도 말이다. 이에 이동진 평론가는 “감독들에겐 자신의 손으로 다시 만들어보고 싶은 영화가 하나씩 있나 보다.”라는 평을 했는데, 나 역시 이 작품을 보면서 이와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스필버그는 이 작품을 진짜 만들고 싶었나보다.” 굳이 그가 아니어도 될 작품을 다시 세상에 내놓았다는 생각 때문이다. [쉰들러 리스트]나 [AI]가 그만이 할 수 있었던 작품이라 치면,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영화 버전은 이미 너무나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아주 오래 전 뉴욕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그래서 다소 구닥다리라 느껴질 수도 있는 작품이다. 게다가 뮤지컬 영화라니. 과연 이 작품이 지금 우리에게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왜 스필버그는 이 작품을 다시 만들고 싶었을까? 아마도 이 의문에 대한 답변을 찾는 것이 이 영화를 읽는 하나의 실마리가 될지도 모르겠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동명 뮤지컬을 영상화 한 작품이다. 그리고 이 뮤지컬은 셰익스피어의 고전 [로미오와 줄리엣]을 원작으로 만들었다. 아마도 이러한 배경을 모르고 본 관객이라면, 이거 진짜 어디에서 많이 본 이야기인데 하면서 보았으리라. 다만 이 작품이 가진 미덕은 그 오래 전 외부의 커다란 힘에 희생된 두 연인의 사랑 이야기가 지금도 여전히 우리에게 다양한 형태로 반복되고 있다는 걸 여실히 보여준다는 것이다. 반목과 대립, 그리고 혐오가 비단 미국의 뉴욕 뒷골목에서 백인 건달과 푸에르토리코 이주민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미지: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이 작품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가장 밑바탕에 깔려있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 같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으로 잘 알려져 있는 이 작품은 여전히 영화로도 다른 변용작으로도 자주 우리 사이에 오르내리는 작품이다. 뮤지컬만 해도 여러 가지 버전이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라이센스와 창작으로 매우 다채롭게 상영되고 있다. 다시 말해 과거의 작품이 아닌 현재의 작품이란 이야기.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던 당대 유력 가문인 케플렛과 몬테규의 자녀인 로미오와 줄리엣은 파티에서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지게 되지만, 두 가문의 분쟁 가운데, 각자의 오라비와 친구가 살해당하면서 사태는 점점 악화된다. 이들은 사랑을 위해 도주를 택하지만 이것 역시 녹녹치 않았다. 급기야 죽음을 가장한 연극을 기획하지만, 서로 간의 오해가 생겨 이 역시 실패로 끝난다. 결국 둘은 현재에 사랑을 묻고 함께 세상을 떠난다. 그 결과 이 가문들은 비로소 평화를 얻는다. 젊은이의 사랑은 언제나 사람들의 흥미를 끄는 매력적인 소재고 이 사랑이 비극적인 상황으로 인해 맺어지지 못하는 스토리는 모두의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단골 플롯이다.

이미지: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이처럼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젊은 남녀의 이루지 못한 사랑 이야기로 그 의미를 갖는다면,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그들의 사랑과 함께 인종간의 대립, 이민자 간의 분쟁을 다루고 있다. 남성에 대한 여성의 폭력 또한 다룬다. 또한 스필버그가 만든 영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이에 더해 도시 개발과 이를 둘러 싼 주민 간의 갈등, 빈민가 문제 등도 추가했다. 물론 이에 대해 정작 러브스토리 자체는 너무 축소된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이편이 더 흥미로웠다. 요즘 우리 사이에 많이 거론되고 있는 ‘혐오’에 대한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를 위해 스필버그가 이 작품을 만들어 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세상의 차별과 혐오에 대한 것은 그가 꾸준히 천착했던 주제였으니 말이다.

이미지: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OTT 사이트에 비하인드 스토리 필름이 제공되고 있어서, 글을 쓰며 겸사겸사 이 영상을 봤다. 영화를 보면서도 신경이 쓰였던 것이, 푸에르토리코 사람들이 사용하는 스페인어를 번역하지 않은 부분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알지 못해 처음엔 무척이나 불편하더라는. 그런데 알고 보니, 번역하지 않은 것이 제작진들의 의도였다 하더라는. 그래서 중간에 “영어로 이야기 해”라는 등장인물들의 지적이 무척이나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사실 내 경우, 요즘 주변에 베트남, 중국 등에서 온 유학생들을 많이 접하고 있다. 내가 지위상 높다 보니, 어눌한 한국어로 더듬더듬 이야기하는 것이 대부분인데, 종종 그나마 한국어를 잘 하는 친구가 열심히 통역을 하는 경우가 있다. 내 앞에서 자기네 말로 떠들 때마다 지켜보는 나는 무척이나 답답한데, 한편으로 그들도 역시 답답하니 저렇게 자기네 말로 이야기를 하는 것이겠지, 란 생각을 한다. 언어가 서툴다는 건, 결국 자신의 생각을 효과적으로 잘 표현하지 못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니까. 아마도 미국에서 영어를 서툴게 한다는 건 더 많은 마이너스 요소를 안고 있었던 것이리라. 이러한 장치 역시 영상에서나 구현 가능한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전과 달리 히스패닉계 배우들을 많이 기용하고 또 함께 협력하여 영화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나왔는데, 그런 마인드가 어쩌면 더 좋은 영화를 만들게 하는 하나의 방식이란 생각이 들어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만드는 이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덧붙이자면, 얼마 전 뮤지컬 원작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작사를 맡았던 손드하임이 세상을 떠났다. 나도 너무나 존경하고 사랑하는 작곡자이자, 제작자. 2020년 그의 90살 생일에 수많은 뮤지컬계 후배들이 코로나 펜데믹 가운데 그의 생일을 축하하며 만들었던 콘서트 영상을 기억한다. 공연에 관심 있는 분들이라면,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스위니 토드], [컴퍼니] 등 손드하임의 손이 닿은 작품을 어깨너머 접한 분들이라면 한번쯤 보시기를 추천한다. 나는 이 영상을 보며, 아직 잡히지 않은 코로나로 세상이 공포로 뒤덮이던 시절에, 이 영상을 보고 얼마나 큰 위로와 용기를 얻었는지 모른다. 새삼 그에게 얼마나 많은 문화의 유산을 빚지고 있는지 느꼈던 시간이었다.

훌륭한 예술가란 그런 것이라 생각한다. 그의 작품을 향유하고 아끼는 많은 팬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뿐 아니라, 끊임없이 세상에 대해 고민하게 만드는 것. 그가 만들었던 수많은 작품을 ‘아름답다’라고만 표현하기엔 충분치 않아 보인다. 그의 작품은 우리를 고민하고 또 곰곰이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런 이야기를 너무 무겁지 않게 그러나 너무 가볍지도 않게 다룬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가 25살 때 썼던 바로 이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도 역시 그 중 하나일 테다. 그리고 그 작품은 그가 세상을 떠났던 지금도 여전히 영화로도, 그리고 한국의 뮤지컬 무대에도 오르고 있다. 그가 전하고자 하던 메시지, 그가 이 세상에서 고치고자 했던 사회의 모순이 여전히 지금도 우리 곁에 숨 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작품에서 가장 잘 알려진, ‘Tonight’가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 건, 그래서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