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닛코

코믹스의 인기가 떨어져가던 1996년, 마블 코믹스와 DC 코믹스는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두 회사의 세계관이 함께 등장하는 크로스오버 이벤트를 벌이기로 한 것이다. 이전에도 이후에도 스파이더맨과 배트맨이 같이 나온다거나 하는 일회성 이벤트는 있었지만, 이렇게 본격적으로 하나의 이야기를 두 회사가 같이 출간하는 사례는 없었다. DC 측에서는 [DC 대 마블], 마블 측에서는 [마블 대 DC]라고 하는 이 이벤트는 한 권은 마블에서 발매하고 그 다음 권은 DC에서 발매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우주 형제의 싸움

태초에 형제뻘인 두 존재가 있었다. 이들은 서로의 존재를 모른 채, 자신이 완전하며 특별한 존재라고 믿었다. 그러다 우연히 서로를 알게 된 이들은 상대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어서 전쟁을 벌였고, 빅뱅이 일어나면서 산산조각이 났다. 조각난 그 파편들은 각각 마블 멀티버스와 DC 멀티버스를 만들었다. 셀 수 없이 많은 세월이 흐른 후, 형제는 의식을 되찾고 마무리를 짓기로 했다.

마블 유니버스의 맨해튼에서 형제의 파편이 발사되면서, 여기에 맞은 몇몇 히어로와 빌런들이 DC 유니버스로 전송되어버렸다. 스파이더맨은 고담시에 나타나서 조커를 만나고, 울버린은 하수구에서 킬러 크록과 싸웠다. 이 스파이더맨은 당시 은퇴한 피터 파커를 대신한 그의 클론인 벤 라일리로,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메트로폴리스시로 가서 클락 켄트와 로이스 레인이 근무하는 데일리 플래닛 신문사의 사진기자로 취업했다.

마블 히어로 대 DC 히어로

우주 형제는 자신들의 히어로들끼리 서로 싸움을 붙여 이기는 쪽의 우주만 남기기로 합의하고 이를 전 우주에 알렸다. 이렇게 해서, 우주의 생존을 걸고 각 유니버스의 선택된 히어로들이 싸우기 시작했다. 재미있게도, 총 11번의 결투 중 6번째까지는 3 대 3으로 승부를 동률로 만든 뒤에, 마지막 다섯 개의 결투는 독자들에 의한 팬 투표 결과에 따랐다. 독자들은 투표용지를 구입해 승자를 선택해서 우편으로 각 출판사에 보냈고, 이를 집계한 결과를 그대로 내용에 반영했다.

이렇게 해서, 울버린은 로보에게 승리했고, 스톰이 번개공격으로 원더우먼에게 이겼으며, 스파이더맨이 지능적으로 슈퍼보이를 물리쳤다. 슈퍼맨은 당시 이성을 갖추고 있는 헐크를 쓰러뜨렸고, 배트맨은 막상막하로 싸우던 캡틴 아메리카를 익사할 위기에서 구해내며 결과적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아말감 유니버스의 탄생

스파이더보이

최종적으로 마블이 승리했지만 그렇다고 DC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사업 철수하는 일은 없다. 애초에 누가 이기든 상관없이 정해둔 결말이 있었던 것이다. 이야기 속에서 이 우주의 형제는 다른 방식으로 해결하기 위해 둘이 하나로 융합되었다. 이렇게 해서, 단 하나의 우주인 “아말감 유니버스”만이 남게 되었다. 마블과 DC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하나의 존재로 결합된 이 세계에서는 스파이더맨과 슈퍼보이가 스파이더 보이라는 하나의 존재가 되는 등 역사 자체가 새로 쓰였다. 아말감(결합)은 마블에선 지구-9602, DC에선 지구-1996으로 분류된다.

다크 클로

아말감 유니버스에서 가장 눈에 띄는 캐릭터는 다크 클로라는 자경단원이다. 본명은 로건 웨인으로, 어릴 때 강도에 의해 부모를 잃고 캐나다에 있는 삼촌에게로 보내졌다. 자라서 군대에 입대한 로건은 슈퍼 솔저 프로그램에 합류하여 뼈에 아다만티움 금속을 이식한 인간병기가 되었다. 뮤턴트인 것이 밝혀진 것도 이 무렵이다. 함께 슈퍼 솔저 실험 대상자였던 동료는 부작용으로 인해 미쳐서, 훗날 로건의 가장 위험한 적인 하이에나(조커와 세이버투스의 결합)가 되었다. 뉴 고담으로 돌아온 로건은 범죄와 싸우는 다크 클로가 되었고, 스패로우와 헌트리스 같은 파트너들을 얻게 되었다.

슈퍼 솔저

과학자들은 외계인의 시체에서 얻은 세포를 이용해 슈퍼 솔저 혈청을 개발하고,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클락 켄트에게 이 혈청과 태양 에너지에서 나오는 방사선을 혼합 투여했다. 덕분에 하늘을 날고 엄청난 괴력을 얻게 된 클락은 슈퍼 솔저로서 전쟁에 투입되었다. 잠시 아메리칸 걸(슈퍼걸과 버키의 결합)라는 사이드킥이 있었지만 작전 중에 사망했다. 사랑하는 여자 로이스 레인은 그가 아닌 세계적 재벌인 렉스 루터와 결혼을 하고 말았는데, 사실 렉스는 히틀러의 친구이자 하이드라의 총수였다. 그는 슈퍼 솔저의 가장 큰 적이 되었다. 렉스의 거대 로봇과 싸우다가 함께 얼어붙은 바다 속으로 가라앉은 슈퍼 솔저는 50년 후에 발견되어 깨어났다.

저지먼트 리그 어벤저스

저스티스 리그와 어벤저스의 결합으로, 슈퍼 솔저가 이끄는 슈퍼 팀이다. 다크 클로와 캡틴 마블(DC의 캡틴 마블과 마블의 캡틴 마-벨의 결합), 아이언 랜턴(아이언맨과 그린 랜턴의 결합), 닥터 스트레인지페이트(프로페서 X와 닥터 스트레인지와 닥터 페이트의 결합), 아쿠아마리너(아쿠아맨과 네이머의 결합), 화이트 위치(자타나와 스칼렛 위치의 결합) 등등의 히어로들이 구성원이다. 바다에서 냉동되어 있던 슈퍼 솔저를 발견하여 구한 것도 이들이다.

저스티스 리그 엑스맨

저스티스 리그 인터내셔널과 엑스맨의 결합을 뜻한다. 화성에서 온 스크럴 외계인인 미스터 X가 이끄는 뮤턴트 팀으로, 저지먼트 리그 어벤저스 소속의 뮤턴트 멤버들이 대거 합류했다. 뮤턴트의 권리 향상을 위해 싸우며, 스톰과 원더우먼의 결합인 아마존을 비롯해, 머큐리(퀵실버와 플래시의 결합), 아쿠아마리너 등이 멤버로 활동했다.

아말감 유니버스, 영화로도 볼 수 있을까?

사실 내용 자체는 새롭지 않다. 초월적인 존재들이 히어로나 빌런들을 서로 싸움붙이는 형식의 이야기는 아주 고전적인 클리셰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볼 수 없을 것 같던 두 출판사의 히어로들끼리 공식적으로 맞붙는다는 설정이 특별한 재미를 준다. DC는 아주 최근에도 아말감 유니버스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했지만, 마블은 어째 슬쩍 발을 빼는 듯한 분위기다. 실현 불가능할 것처럼 여겨지던 내용들이 하나씩 영상화되어가는 지금, 이 내용만큼은 실사화던 애니화던 어느 쪽이라도 정말로 영상화가 쉽지 않을 것이다. 혹시나, 마블 스튜디오가 폭스를 인수했듯이 누군가가 두 회사를 다 소유해버리는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모를까.